오피니언 중앙시평

학과 벽 허물어야 세계 일류대학 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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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7면

이러한 추세에 선진국의 대학들은 발 빠르게 대응하고 있다. 미국의 스탠퍼드 대학은 10여 년 전부터 생명과학 분야의 학제 간 연구를 위해 Bio-X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공학자와 예술가, 인문·사회학자들이 모여 공동으로 연구하고 공부하는 ‘디자인 연구소’도 운영하고 있다. 융합연구의 원조 격인 MIT의 미디어랩은 역사가 벌써 25년이 되어 가고, 기발한 발상의 창의적인 업적으로 명성을 날리고 있다. 일본의 도쿄대학도 최근 가시와(柏) 시(市)에 학제 간 첨단 연구를 위한 새로운 캠퍼스를 설립하고, 과학과 인문사회 분야를 넘나드는 여러 융합 분야의 대학원 과정들을 운영하고 있다. 이처럼 선진국의 일류대학들은 학제 간 연구를 하는 조직을 만들어 융합의 시대를 이끌어 갈 준비를 하고 있다.

물론 이 같은 추세에도 불구하고 수학·물리 같은 전통적 학문영역의 학과들도 같이 존속하리라는 예상이 많다. 학제 간 연구에 종사하는 연구원이라도 적어도 한 분야의 전문성은 가지고 있어야 하고, 이러한 전문가를 길러내는 데에는 이들 전통적 학과가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외국의 선진 대학에서는 전통적인 학과에 소속된 교수들에 대해서도 융합적 교육과 연구를 장려하는 여러 정책을 쓰고 있다. 대표적인 방법이 교수를 2개 이상의 학과에 겸직 발령 내거나 학제 간 연구소에 소속하게 하는 것이다.

이런 정책 덕분에 이들 대학에서는 대부분 교수가 여러 연구소나 학과에 소속돼 있고, 학생들도 자유롭게 전공을 넘나들면서 학제 간 연구를 수행하고 있다.

그러면 한국의 대학들은 이러한 세계적 추세에 얼마나 따라가고 있나. 불행하게도 그 대답은 매우 부정적이다. 물론 우리나라에서도 서울대에 융합과학기술대학원이 설립되는 등 융합 교육·연구기관이 생기기 시작했지만, 학문 융합의 정신이 전(全) 대학에 스며드는 데에는 한계가 있어 보인다.

우선 제도 자체가 너무 경직적이다. 한 예로 한국에서는 규정상 대학교수가 하나의 학과에만 소속되게 돼 있어 외국 대학처럼 여러 학과에 겸임교수로 근무하면서 다양한 분야의 학제 간 교육·연구를 할 수 있는 길이 막혀 있다. 게다가 교수들 자신이 자기 학문 분야를 벗어나려는 노력이 부족하고, 학과 간 장벽을 너무 높게 치고 있다. 이 같은 폐쇄성 때문에 자기 영역 고수 등 기득권 지키기가 성행하고, 지식의 파이를 키우기보다 파이를 어떻게 나누느냐에 더 관심이 있는 듯이 보이기도 한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학생들이 교수들의 이러한 행태를 보면서 미지의 영역을 탐구하려는 도전 정신이나 모험 정신을 잃어버리는 것 같다는 점이다. 경계를 뛰어넘는 지적인 용기를 가진 학생이 많이 나와야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창의적인 학문 업적이 나오는 것인데, 이처럼 넓은 시야를 가진 인재의 양성이 점점 어려워지는 것이다.

한국 대학이 세계 일류가 되기 위해서는 이러한 폐쇄성을 시급히 벗어나야 한다. 삼성전자 기술총괄사장을 지낸 황창규 박사는 삼성이 소니를 따라잡을 수 있었던 것은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바뀌는 시대였기 때문이라고 말한 바 있다. 즉 패러다임이 바뀔 때가 과거의 일등을 뛰어넘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는 말이다. 전통적인 학문 분야를 벗어나 다학제적 융합으로 학문의 패러다임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이때가 바로 한국 대학이 선진국 대학들을 따라잡고 뛰어넘을 수 있는 좋은 기회인 것이다. 한국 대학들은 세계적 일류대학이 될 수 있는 이 기회를 놓쳐선 안 되고,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학과 간 장벽을 허무는 일이 급선무다.

오세정 서울대 교수· 물리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