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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신춘중앙문예 단편소설 당선작] 오영섭 '조롱' (1)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58면

횡단보도를 건너자마자 그는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이렇게 말했다.

"뼈가 부러질 때 어떤 소리가 나는지 아십니까?" 날씨가 꽤 쌀쌀한 편이었으므로, 나는 그의 말에 최면이라도 걸린 듯 뼈마디가 욱신거렸다. 어딘가에 잘못 부닥치기라도 하면 정말로 뼈가 부러질 것만 같았다. 어찌할까 하다가 나는 그냥 "글쎄요, 뼈가 부러지는 소리라니" 하고 얼버무렸다. 그는 오른손으로 자신의 왼쪽 팔뚝을 툭툭 쳐대고 있었다. 휘익, 휘익 하고 손의 움직임을 따라 바람 가르는 소리를 내기도 했다.

"이렇게 내리친다고 내 팔뚝이 부러지기라도 하겠습니까?" 그가 다시 나에게 물어왔다. "글쎄요, 황비홍이라면" 하고 나는 다시 건성으로 대답했다. 그러자 그는, "아, 황비홍!" 하면서 그럴 만하다는 듯이 몇 번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우리 어디 가서 좀 앉읍시다!" 라고 오랜만에 반가운 지기라도 만난 양 소리쳤다. 주위를 슬쩍 둘러보더니, "그렇군요, 저쪽 어딘가에 괜찮은 카페가 있었습니다. 자, 갑시다" 하고는 동의도 구하지 않고 성큼성큼 걸어가기 시작했다.

우리는 약 3분 전쯤 횡단보도 위에서 마주쳤었다. 파란불이 켜지자 그는 사람들 사이를 헤치며 반대편에서 내 쪽으로 걸어왔는데, 내 어깨를 툭 치더니 이렇게 묻는 것이었다.

"이봐요, 혹시 K대 나온 김상식이가 아니오?" 나는 물론 아니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그는 다시 이렇게 말했다. "아, 그래요? 일단 건넙시다. 이곳에 있다가는 어느 미친놈 페달에 횡사할지도 모르니까. 자, 어느 쪽으로 건너시겠습니까□" 황당한 느낌이 없지는 않았지만, 나는 그저 내가 건너야 할 곳을 흘끗거렸다.

휴가 기간 동안 뭐 읽을 만한 책이 없을까 하고 서점에 가는 길이었으므로. 휴가의 첫날이었고, 서점은 건너편에 있었다. 그는 나를 따라 왔던 곳으로 되돌아 건넜다. 그가 왜 나를 따라왔는지에 대해서는 이렇다 할 말이 없다. 우리는 서로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는 완벽한 타인이었다.

그러나 잠시 망설이다가 나는 곧 그의 뒤를 따라 걸었다. 휴가라고는 했지만 별다른 약속도 없었고 서점은 이튿날 들러도 문제될 게 없었다. 알게 모르게 그간의 내 일상이 권태로웠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렇기는 해도 왠지 이런 풍경이 낯설다는 느낌은 지울 수가 없었는데, 그가 내뿜는 묘한 분위기는 그런 느낌마저도 일축해버렸다.

나는 걸으면서 그의 뒷모습을 아래위로 죽 훑어내렸다. 훤칠한 키, 그럴싸한 몸매, 어쩐지 패션모델과 비슷한 걸음걸이. 사실 그의 어색한 걸음걸이는 웃음을 자아냈지만, 그 어떤 자력에 이끌려 궤도를 이탈하는 별처럼, 나는 몸의 중심이 한쪽으로 쏠리는 느낌을 충분히 받았다. 함께 가면서도 기분이 썩 달갑지만은 않았던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그래도 변명의 여지는 있었다. 배타적 심상의 발로랄까? 최소한 따분할 것 같지는 않았다. 우리는 10층 건물의 맨 꼭대기에 있는 어떤 재즈 카페로 들어갔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날이 좀 춥지요? 카페 안은 따뜻할 겁니다. 추우면 모든 것이 얼고, 얼면 그 어느 것이나 깨지기 쉬운 법이지요. 그 약하고 귀여운 것들! 자, 우리에게는 따뜻한 차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바로 카페의 실내였다. 우리는 창가 쪽으로 자리를 잡았다. 창 밖으로는, 백화점 두 개가 큰길을 사이에 두고 우리처럼 나란히 마주보고 있었다. 때없이 속이 비치는 하얀 색 원피스를 입고 있는 여종업원이 주문을 확인하고 카운터로 걸어갔다.

카페로 걸어오는 사이에 그는 J대를 졸업했다고 나에게 말했었다. 그때 나는 약간 놀랐는데 바로 내가 졸업한 대학이었기 때문이었다. 공교롭게도 우리는 학번도 같았다. 나는 금세 마음이 불안해져 캠퍼스의 여기저기로 생각을 뻗어보았다. 상대방이 완벽한 타인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들면 누구나 당황하게 마련이다.

모르는 사람인 양 한참을 이야기하다가 퍼뜩 그가 누구라는 걸 깨달았을 때 느끼는 당혹함은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도 그는 여전히 내 기억 속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완벽한 타인이었다. 가까이 다가갈 필요도 없는, 그렇다고 구태여 멀리할 이유도 없는.

"사실 나는 오늘부터 휴가입니다. " 커피 잔을 내려놓으며 내가 말했다. "그렇습니까? 나는 이미 한달 전부터 휴가였습니다만. 조그마한 무역회사에 다녔는데 어느 날 갑자기 사장의 행방이 묘연해지더군요. 그 바람에 자동차 한 대만 공짜로 생긴 격이지요. 차를 버리고 갔더군요. 그 차는 주로 제가 이용하긴 했습니다만. 외국에서 가져온 여성복 샘플을 차에 싣고 백화점을 돌면서 공급 계약을 하곤 했지요. 잘되지는 않았습니다. "

"직원은 몇 명이었나요?" "나하고 여직원 한 명이 있었지요. 그 여자는 별로 매력적이지 않았습니다. 사무실에 앉아 꾸벅꾸벅 졸기 일쑤였지요. 그런 여자는 딱 질색입니다. 뚱뚱한데다가 꾸미지도 않고 말투는 투박하기까지 했지요. 그 여자가 잃어버린 것은 상냥함이 아니라 연약함이었습니다. 쇠망치로 내리쳐도 부서지지 않을 것 같은 여자였습니다. "

"나도 그런 여자에게서는 별 매력을 못 느끼지요. "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휴가라고 하셨는데?" "아, 예. 그렇습니다. 정확히 다음주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5일간이지요. 그렇지만 우리 회사는 토요일에 근무를 하지 않기 때문에 오늘부터 다음주 일요일까지, 즉 9일간 쉴 수 있습니다. "

"무슨 계획이라도 있습니까?" "아니오, 아직 없습니다. 원래는 그냥 집에서 푹 쉬고 싶었는데, 막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해변이 있는, 어디 근사한 외국에라도 나갔다 올까 생각 중입니다. 이곳 인테리어가 그런 분위기를 풍기는군요. "

"카리브 해는 여기서 좀 멀지요. 가까운 곳이 어떻습니까? 이를테면 파타야라든가, 푸켓, 혹은 사이판이나 괌 정도. 요금도 그리 비싸지 않습니다. 파타야 같은 경우는 5일에 여행사 패키지로 3십9만9천원이지요. 사이판은 그보다 조금 비쌉니다. 5일에 7십9만9천원이지요. "

"여행사에서도 근무한 적이 있었습니까? 그렇지만 가격에서는 좀 싸구려 냄새가 나는군요. 9만9천원이라니. " "아, 나도 어디 갔다올 만한 곳이 없나 생각 중이었습니다. 지나는 길에 여행사 유리창에 붙어 있는 광고를 봤습니다. 가격이야 오래된 코미디지요. 무덤의 핑계를 따지다 보면 사는 게 서글퍼집니다. "

말을 마치고 그는 일어나 화장실을 갔다. 시계를 보니 여섯 시가 가까웠다. 또박또박 실내를 걸어다니던 여종업원은 나와 눈이 마주치자 테이블로 와서 꼿꼿한 자세로 재떨이를 갈아주었다. 그 사이에 그가 돌아와 다시 내 앞자리에 앉았다.

"이번 휴가를 나와 함께 보낼 생각은 없습니까? 지방의 조용한 곳에 작은 집이 하나 있습니다. 아 물론, 술도 좋은 게 약간 있습니다만. 어떻습니까?" 나는 말없이 고개만 갸우뚱했다.

"그냥 친구가 필요할 뿐입니다. 우리는 오늘 처음 만났지만 벌써 한 시간 가까이 같이 있었습니다. " 그는 손가락으로 자신의 시계를 툭툭 두드렸다. "휴가를 휴가답게 보내는 방법을 알고 있습니까?" "흠,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방법이라면 비교적 할 얘기가 많습니다만. 그저 부딪치는 대로 살아가면 되는 게 아니겠습니까? 휴가도 마찬가지입니다. 애써 즐거우려 하지 마십시오. 모든 강박에서 벗어나면 세상은 즐겁습니다. 그나저나, 식사할 시간이 다 되었군요. 일어납시다. 내가 좋은 식당을 한군데 알고 있습니다. 그리 멀지 않습니다. "

우리는 카페를 나와 백화점 앞에서 택시를 탔다. 택시는 한 십 분쯤 달려 미국식 고급 레스토랑 앞에서 멈추었다. 거리는 이미 어둑어둑했다. "여기, 내가 종종 식사를 하는 곳이지요. 혼자서도 가끔 옵니다. " 계단을 오르며 그가 말했다.

현관에 들어서자 여러 명의 웨이트리스가 나란히 서서 인사했다. 몇몇 웨이트리스는 풍선을 들고 있었다. 그 중 한 명이 우리를 창가 구석자리로 안내했다. 우리는 스테이크와 버팔로 윙, 그리고 와인을 주문했다. 주문을 확인한 다음 웨이트리스가 그에게 말을 걸었다.

"왜 언제나 이 자리를 원하세요?" 그가 웨이트리스를 올려보며 말했다. "오늘은 아이섀도까지 했군요. 훨씬 좋아 보입니다. 안경도 렌즈로 바꿨군요?" "네. " "그것 봐요. 애초에 안경이 어울리지 않았습니다. " 이트리스는 미소를 지었다. 스무 살 안팎으로 보였는데, 미소를 지으니 꽤나 수수한 용모였다.

"그럼 가서 일보세요" 라고 그가 말하자, "네" 하고 인사를 한 다음 그녀는 주방 쪽으로 걸어갔다. "아는 사이입니까?" 내가 물었다. "나는 여기 단골입니다. " 그는 말하고 나서 물을 한 모금 들이켰다. 그리고 손을 들어 창 밖을 가리켰다.

"저기를 좀 보세요. 저쪽 모서리에 매달린 고드름이 보이십니까?" 나는 그가 가리키는 대로 창 밖을 내다보았다. 가늘고 긴 고드름 몇 개가 차양 밑에 매달려 있었다. "나는 저것들을 부수고 싶어서 미칠 지경입니다. 저 정도면 꼭 황비홍이 아니더라도 내 손날로 멋지게 잘라낼 수 있을텐데 말입니다. 얼음 깨본 적 있습니까? 강이나 개울, 혹은 웅덩이에 얼어 있는 얇은 얼음 말입니다.

그런 얼음을 바라볼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그냥 지나치지 않습니다. 발로 콱 밟아 깨버리지요. 그 얼음이 깨질 때 어떤 소리가 나는지 아십니까?" "와작. " 나는 무심결에 얼음 깨지는 소리를 냈다. "바로 그겁니다. 와작, 와자작. 나는 그런 소리들을 좋아합니다. 세상의 모든 약한 것들, 그것들은 제 몸이 부서질 때마다 한결같은 소리를 내지요. 그 소리가 뭔지 아십니까? 바로 관능입니다. 온몸을 전율케 하는 관능의 외마디 소리를 지르고 그것들은 세상에서 사라지는 겁니다. 아직까지 그보다 더한 쾌감을 느껴본 적은 없습니다. 지방에 있는 내 집, 아까도 말했지만, 그곳에는 그런 얼음이 널려 있지요. 모조리 깨부순 다음 조용히 잠을 잡니다. 아침에 일어나 보면 또 얼어 있지요. 부숴야 합니다. 놔두면 저절로 녹아 없어집니다. 그건 아무 의미가 없지요. 한번 갑시다. 좋은 곳이에요. "

스테이크와 와인이 우리 앞에 놓였다. 웨이트리스는 다시 한 번 그에게 눈인사를 했다. 그가 포크와 나이프를 손에 쥔 채 물었다.

"그런데, 무슨 일을 하십니까?" "비교적 이름이 알려진 회사의 홍보실에 있습니다. 사보를 편집하는 일을 하고 있지요. 한 달에 한 권 사보가 나옵니다. " 그는 스테이크 한 조각을 입에 넣고 우물거렸다. "아하, 종이! 종이를 만지는군요. 종이를 찢어본 적이 있습니까?" "이면지를 활용해야 하기 때문에 자주 찢지는 않습니다만. "

"종이를 확 찢는 게 더 즐겁습니까? 아니면 손가락이나 볼펜으로 콱 뚫어버리는 게 더 즐겁습니까?" "글쎄요" 하고 말한 다음 나는 와인을 한 모금 마셨다. "느낌상으로는 콱 뚫어버리는 게 더 즐거울 것 같군요. " 나는 그의 말투를 흉내내고 있었다.

"그렇지요? 나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혹시 학교 다닐 때 상경대에 와봤는지 모르겠는데, 그곳 유리창이 심심찮게 박살이 나곤 했지요. 아십니까?" "글쎄요. " "모두 내가 박살낸 것이지요. 덜컹거리거나 조금이라도 금이 간 유리창은 용서하지 않았습니다. 나뭇가지도 여럿 부러뜨렸고, 너덜너덜한 대자보는 다 찢어버렸습니다. 그래도 세상에는 그런 것들이 너무나도 많이 생겨나더라는 것이지요. 이제는 슬슬 지긋지긋할 만도 한데 아직까지는 힘이 넘치는군요. " "알고 보니 당신 아주 재미있는 사람이군요. "

"그렇지 않습니다. 아까도 말했지만, 문제는 그런 것들은 그냥 두면 저절로 사라진다는 것이지요. 나는 그것을 참을 수 없는 것뿐입니다. 내가 느끼지 못하는 관능은 이미 관능이 아니지요. " 나는 버팔로 윙 하나를 소스에 찍어 먹었다. 음식은 맛이 있었지만 양이 많지는 않은 곳이었다.

"저 고드름을 다시 한 번 보십시오. " 나는 다시 고드름을 쳐다보았다. 아까와 똑같은 모습으로 꽁꽁 얼어 있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뭐가요?" "유독 저쪽 한 구석에만 고드름이 생깁니다. 반대편에는 없지요.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면 누구나 알 수 있겠지만 그것은 이 건물이 기울어 있다는 뜻입니다. "

"네?" "세상에는 이런 일도 비일비재합니다. 그렇지만 너무 신경쓰지 마십시오. 내년 봄까지는 끄떡없을테니까. " 그는 냅킨으로 입술을 닦아냈다. 식사를 마친 후에 우리는 커피를 마셨다.

몇 번인가 웨이트리스가 우리 테이블을 지나다가 그와 담소를 나누었다. 그녀는 웃을 때마다 입가에 보조개가 들어갔는데, 나에게도 가끔씩 눈인사를 보내주었다. 커피를 마시는 동안 그는 계속해서 지방에 있는 작은 집 이야기를 꺼냈다.

재미있는 휴가가 될 것이다, 당신에게 보여주고 싶은 것이 많다, 라는 식의 말들이었다. 그는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오랫동안 그곳에 가지 않았습니다. 때문에 그 시간만큼 그곳에 고여 있을 적막이 나를 미치게 하는 것이지요. 그곳은 조용합니다. 눈을 감으면 적막이 유리처럼 사방에 깔려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지요. 바람 한 점만 불어와도 깨져버리는 그 적막의 관능을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나는 적막을 깨는 여러 가지 방법을 알고 있습니다. " 그는 아직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은 것이 있다고 덧붙였다.

나는 슬슬 그것들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식당에는 로고가 그려진 색색의 풍선들이 몇 개의 테이블에 떠 있었다. 식당의 입구에서 웨이트리스들은 어린이들이 입장을 할 때마다 풍선을 하나씩 나누어주었다. 커피를 다 마신 다음 그는 담배를 한 개비 피워 물었고 곧바로 카운터로 가서 계산을 치렀다.

그리고 현관을 향해 걸어가다가 어떤 아이가 들고 있던 풍선에 실수인 척 담배를 그었다. 펑, 하는 소리와 함께 풍선이 터져버렸다. 아이는 놀라 울음을 터뜨렸고 그는 아이의 부모에게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 식당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우리를 쳐다보았다. 식당을 빠져나와 계단을 내려오면서 그는, "사실 풍선은 재미없습니다" 라고 말했다.

식당 주위는 이미 어둠이 짙게 깔려 있었다. 그는 어디 가서 술을 마시자고 했지만, 이미 휴가를 같이 보내기로 했으니 술은 그때 마셔도 되지 않겠느냐고 내가 말했다. 우리는 다음주 월요일에 다시 만나기로 한 다음 식당 앞에서 헤어졌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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