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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별 악의 개념 변천 추적…'악마의 문학사' 출간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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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머나먼 북녘에 살면서 빨간 가죽옷을 입고 순록을 몰고 다니다 연기에 그을린 검은 모습으로 굴뚝을 타고 내려가는 사람은? 당연히 산타클로스를 떠올리겠지만 놀랍게도 중세 민담에 따르면 정답은 악마다.

'검은 베드로' 라고도 불렸던 악마는 선물 꾸러미 대신 못된 아이들을 집어넣을 커다란 주머니를 등에 지고 다니며, 사람들은 선물을 기대하기는 커녕 그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으려 음식과 술을 집 앞에 놓아둔다.

악마의 지극한 권능을 강조함으로써 선과 악을 명백히 대립시켰던 중세 수도사들의 영향으로 당시 민중 사이에선 악마가 주는 공포를 덜기 위해 이처럼 우스꽝스럽고 자유로운 상상이 가미된 민담이 유행했다.

'악마의 문화사' (제프리 버튼 러셀 지음.최은석 옮김.황금가지.1만5천원)는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신학.민속학.문학.미술 등 다방면에 걸쳐 나타난 악마의 면모를 기술함으로써 악의 개념을 추적하고 있다.

캘리포니아 주립대 역사학 석좌교수인 저자는 지난 77년부터 10년간 악마의 존재를 고찰한 네 권의 저서를 펴내고 이를 종합해 이 한 권에 담았다.

저자는 악마에 대한 시대별 인식의 발전 과정을 살펴보는 것으로 악마의 존재 규명에 필요한 기초 공사를 시작한다.

구약성경의 악마(devil)란 '가로막는 자' 라는 의미를 지닌 '사탄(satan)' 에서 나온 말로, 악마는 신과 대척점에 서 있는 악의 유포자였다.

신약성경은 이를 심화시켜 타락한 천사들의 우두머리격인 악마와 그에 맞서 싸우는 구세주의 양자 대결 구도를 만들어냈다.

요한계시록에서 악마는 적 그리스도나 야수, 용의 모습으로 다양하게 변용된다.

스콜라 철학자들은 엄청난 지성을 타고난 악마가 조물주로부터 부여받은 자유의지로 악의 중심이 돼 활동한다고 생각했다.

이를 입증하기라도 하듯 단테의 '신곡' 에서 악마는 우주의 중심이며 증오와 어둠과 절망을 상징하는 초월적 존재로 그려진다.

16~18세기에 걸쳐 악마와 마녀는 예술 장르의 주요 소재로 등장해 흥미를 끈다.

가령 메피스토펠레스라는 악마 캐릭터가 등장하는 괴테의 '파우스트' , 어린아이의 시체를 안고 있는 마녀의 모습을 묘사한 고야의 유화 '마녀' 등이 그것. 셰익스피어의 '햄릿' '리어왕' 에 이르러서는 인간의 내면에 똬리를 틀고 외부로 그 기운을 발산하는 악마성의 존재가 비로소 명시적으로 드러나게 된다.

이 책에 따르면 현대에 접어들면서 이러한 악마의 존재 자체는 퇴색했지만 대신 집단적이고 공공연하게 자행되는 대량학살이나 테러리즘.인종차별과 같은 현대적 모습으로 변신한다.

저자는 '악마란 무엇인가' 를 끊임없이 되뇌여왔던 이 긴 여행의 말미에서 "악을 현실적으로 바라볼 것" , 즉 "인간은 선과 악을 동시에 행할 능력을 지니고 있기에 사랑의 실행을 통해 악의 힘을 최소화할 것" 을 주문한다.

악의 근본적 존재를 믿든 믿지 않든 간에 세계 속에 현실적으로 작용하는 악의 힘을 최소화하려는 적극적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지나친 이상론이긴 하지만 이는 현대인이 되풀이해온 '악마적 방식' 에 의한 오류를 이제 반성하자는 촉구이기도 하다.

기선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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