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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 임금을 비판한 조선의 ‘앙팡 테리블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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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리학의 틀을 짜 놓은 주자. 조선조 선비들과 왕은 성리학의 틀 속에서 국가 비전을 구하려 머리를 맞댔다.

“과문(科文·과거시험에 등장하는 여러 문체의 글)이 나옴에도 성인의 도는 행해지지 않는다. 과문이라는 것이 되레 도를 해치는 함정이요, 인재를 해치고 국가를 병들게 하는 것인고로 ….” 조선조 내내 과거시험 비판론이 있었다지만 『서유견문』의 저자 유길준은 급소를 찌른다. 그의 글 ‘과문폐론’은 사뭇 단정적이다. “내 성인의 도로써 치국(治國)한다는 말은 들었어도 과문으로 치국한다는 말은 들은 적 없다.”

과거에 대한 강도 높은 비판은 구한말이라는 시대배경 탓이 분명하다. 중세적 질서를 버텨온 그 인재 등용문에는 동전의 앞뒤처럼 역기능과 순기능이 함께 있었을 텐데, 신간 『책문』은 순기능 쪽에 초점을 맞춘다. 최종합격자 33명을 놓고 이들의 등수를 정하는 과거의 마지막 관문인 책문은 왕과 합격자들 사이에 ‘지금 힘써야 할(時務) 국가대책(策)의 요체를 논하는 글’이 응답 형태로 진행되는 글쓰기다.

『책문』은 조선조 500년사의 유명한 책문 13개를 뽑았다. 세종과 성삼문 사이의 책문 등을 번역한 뒤 배경을 설명하는 별도의 글을 실었다. 놀라운 점은 국가고시라고 하는 관료적 틀 속에 이토록 진정성이 담긴 고뇌의 글을 주고 받았다는 점이다. 그것도 대권을 쥔 왕 앞에서 ‘죽음을 무릅쓰고’(그게 책문 문장의 단골 수사(修辭)이다) 소신을 밝히는 사람은 한갓 새내기 관료예비생에 불과한데도 말이다. 임금의 절박한 질문, 새내기 관료의 당찬 국가의 비전 사이에는 때론 팽팽한 긴장감마저 돈다. 이런 식이다.

“공자께서는 3년이면 정치적 이상을 성취하겠다고 했다. 나는 벌써 10년인데 갈 길이 멀다. 이 시대에 이상적 정치를 이룩하려면 먼저 무엇에 힘써야 하겠는가?”(131쪽) 1515년 책문 때 중종이 내린 질문이다. 답을 하는 이는 젊은 이상주의자 조광조인데, 당당하다 못해 임금의 심기를 거스르는 역린(逆鱗)조차 서슴지 않는다. “기강이 서지 않았다면 그게 어찌 임금의 정성 부족 때문이겠습니까. 정치의 근본을 터득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근본은 도의 실현을 목표로 두는 것입니다.”(138쪽)

물론 새내기 조광조는 “거칠고 무식한 제가 무엇을 알겠습니까”하고 짐짓 예의를 차린다. 그러면서도 “군주가 혼자 정치를 하는 것이 아니라 대신에게 믿고 맡기라”는 직언도 던진다. 국가 비전에 대한 왕의 고뇌, 젊은 관료의 패기가 서로 부딪치는 책문이 실제로 정면 충돌로 이어진 경우도 있었다. 1611년 광해군·임숙영 사이의 책문이 그것인데, 위험수위를 넘나들었던 임숙영의 글은 영의정 이덕형 등 대신 사이의 찬반논쟁으로까지 번졌다.

당시 질문과 응답은 이랬다. “지금 가장 시급한 나랏일은 무엇인가?” 광해군의 이런 질문에 임숙영은 “나라의 병은 임금에게 있습니다”라고 대찬 발언을 했다. 언로(言路)가 열리지 않았고, 인사가 엉터리라는 지적까지 쏟아냈으니 광해군이 진노할 만도 하다. 이때 임숙영을 내치려 했던 그 광해군도 신하들의 압박에 밀려 파동 4개월 뒤 임숙영을 등용해야 했으니 조선조의 사회 탄력성 혹은 신축성이란 게 그리 간단치만은 않았음을 암시한다.

어쨌거나 우리는 지난해 나온 『조선의 뒷골목 풍경』(강명관 지음· 푸른역사)이 지적했던 과거시험의 폐해를 기억한다. 문과 합격자의 경우 임용 가능한 일자리는 500개인데도 무수한 관료예비군을 양산했고, 붕어빵 지성을 키우는 ‘공장’이었다는 지적 말이다. 부정부패도 심했다. 반면 『책문』은 과거시험의 속살을 드러내는 데 성공한 고전 리메이크의 좋은 모델이다.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그린비)이 등장한 이후 한문 전적에 대한 개발 가능성을 넓혀준 후속 주자로 칭찬할 만하다.

조우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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