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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딩뱅크의 조건, 자산 400조원을 넘어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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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호 03면

#1. 지난해 10월께 황영기 당시 KB금융지주 회장이 김승유 하나금융그룹 회장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두 회사를 합치자. 통합 CEO는 김 회장이 맡으라’는 제안이었다. 얼마 뒤 돌아온 대답은 ‘노’였다. 하나 입장에선 자산 규모가 두 배 이상인 KB와 합치면 말이 합병이지 사실상 인수를 당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고 생각했을 터였다.

은행들 3차 M&A대전, 생존 아닌 1등이 화두다

#2. 1년이 흐른 지난달 16일 이팔성 우리금융그룹 회장이 취임 뒤 처음으로 전 직원에게 e-메일을 보냈다. 그는 “인수합병(M&A)을 포함한 여러 가지 루머가 있지만 동요할 필요가 없다. 금융산업 재편이 어떠한 방식으로 전개되더라도 우리가 중심 역할을 할 것”이라고 했다. 이 회장이 e-메일을 보낸 것은 ‘하나은행과 우리은행의 합병설’ 때문이었다. 금융가에선 ‘예금보험공사가 갖고 있는 우리금융 주식과 하나금융 주식을 맞바꾸는 지분 맞교환 방식으로 우리은행을 인수한다’는 시나리오의 진원지로 하나은행을 지목한다.

은행권에 전운이 감돌고 있다. 순위를 통째로 뒤바꿀 수 있는 굵직한 M&A 논의가 본격화하고 있다. 정부는 지난주 예보의 우리금융 지분 73% 중 7%를 다음 달 초까지 매각하기로 했다. 추가로 16%를 더 판 뒤 내후년께 나머지 50%+1주를 팔아 민영화를 완료한다는 계획이다. 민영화를 앞두고 있는 산업은행도 지난주 정책금융공사와 분리돼 일반 상업은행으로 재출범했다. 이에 앞서 외환은행 대주주인 론스타는 1년 내에 은행을 팔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이들의 자산규모는 작게는 107조원(외환은행)에서 많게는 296조원(우리금융지주)에 이른다. 산업은행도 142조6000억원이다. 살림을 합칠 은행을 단번에 리딩뱅크에 올려 세울 수 있는 잠재력을 갖고 있다. 그만큼 은행들 사이의 신경전도 치열하다. 때에 따라 공수를 뒤바꾸고, 자신에게 가장 유리한 시나리오를 퍼트리느라 분주하다.

금융위기 한숨 돌리자 본격 시동
외환위기 이후 부실은행 퇴출과 합병이 ‘1차 M&A 대전’, 이후 10년간 생존을 위한 은행 간 이합집산이 ‘2차 대전’이라면 다가올 M&A는 ‘3차 대전’에 비유된다.

‘1, 2차 M&A’는 주로 생존을 위한 것이었다. 부실은행이 우량은행에 인수되는 게 전형이었다. 충청은행과 보람·서울은행이 하나금융에 인수됐고 주택은행과 장기신용은행이 KB지주 식구가 됐다. 상업은행과 한일은행이 합친 한빛은행은 우리금융의 전신이다. 주역은 정부였다. 싫다는 은행들을 억지로 붙잡아 손을 잡게 했다.

‘3차 대전’의 분위기는 사뭇 다르다. 일방적인 인수보다는 합병의 성격이 강해졌다. 강자와 약자가 뚜렷이 구분되지 않을 만큼 은행들이 대형화됐기 때문이다. 하나금융 측은 “우리금융을 인수하려는 게 아니라 합병하려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우리금융 역시 KB지주나 신한금융과의 합병 시나리오를 검토하고 있다. 목표도 당장의 생존보다 리딩뱅크에 맞춰져 있다.

삼성금융연구소 김승진 상무는 “국내 시장이 포화상태에 달해 자력성장이 힘들어진 상황에서 M&A를 통해 1등 프리미엄을 확보하겠다는 게 은행들의 생각”이라고 분석했다. 정부와 은행의 역할도 역전됐다. 은행들이 분위기를 띄우고 정부가 만류하는 모양새다. 진동수 금융위원장은 여러 차례 “은행들이 외형 경쟁을 하지 말고 질적 경쟁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민유성 산업은행 행장이 외환은행 인수 가능성을 내비치자 ‘말조심하라’는 경고가 전달됐다. 금융위 관계자는 “지금은 은행 합병이 아니라 금융위기 극복이 최우선 과제”라며 “달러가 없어 죽다 살아난 은행들이 조금 형편이 폈다고 M&A에 달려드는 게 말이 되느냐”고 했다.

‘국민-외환’, ‘하나-우리’설 무성
그럼에도 은행들은 물밑에서 바쁜 움직임을 계속하고 있다. 현재 가장 현실성이 있는 시나리오로는 국민은행의 외환은행 인수가 꼽힌다. 강정원 KB금융지주 회장 대행 겸 국민은행장은 여러 차례에 걸쳐 외환은행 인수 의향을 밝혀왔다. 검찰수사로 무산됐지만 이미 론스타와 양해각서(MOU)까지 체결했던 경험도 있다. 해외에 강한 외환은행과 주택대출 등 소매금융(리테일)에서 최강자인 국민은행이 합치면 시너지 효과도 충분하리란 계산이다. 김정태 전 행장 이후로 수성에 치중하는 사이 턱 밑까지 추격한 우리·신한금융지주를 다시 멀찌감치 따돌리는 효과도 기대할 수 있다. KB지주 관계자는 “가장 취약한 증권사를 하나 인수하고 은행부문에서 외환은행 정도를 합병하면 사업 포트폴리오를 완성하고 규모의 경제도 달성할 수 있다”고 말했다. 문제는 가격이다. 2006년 때 가격은 6조5000여억원이었다. 금융위기가 터지면서 이 금액이 5조원까지 떨어졌지만 KB로선 아직 부담이다. 론스타도 양보하기 쉽지 않다. 원화가치 하락으로 달러로 환산한 매각 가격이 더 떨어졌기 때문이다. KB와 론스타 간 치열한 가격 협상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외환은행의 강점이었던 우수한 인력이 그동안 많이 빠져나가 인수 매력이 많이 떨어졌다는 얘기도 나온다.

하나금융의 우리금융 인수설도 시장에 널리 퍼져 있다. 증자로 늘린 주식을 예보가 갖고 있는 우리금융 주식과 맞바꿔 경영권을 확보하는 시나리오다. 하나금융도 희망사항임을 굳이 부인하지 않는다. 되기만 하면 단박에 1등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다.

하지만 두 가지가 걸림돌이다. 가장 큰 고민은 거래 당사자가 모두 이명박 대통령과 가까운 사람이란 점이다. 김승유 회장은 대통령과 대학 동기동창, 이팔성 우리금융 회장은 금융권의 대표적인 ‘MB맨’이다. 정권이 바뀐 뒤 특혜 의혹이 불거질 수 있다. 예보와 주식 맞교환을 하면 경영권 프리미엄을 줄 방도도 마땅치 않다. 공적자금 회수율을 높여야 하는 예보로선 받아들이기 어려운 선택이다. 임일성 메리츠증권 애널리스트는 “예보로선 우리금융 지분이 통합은행 지분으로 바뀌는 셈인데 어차피 팔아야 하는 건 마찬가지”라고 지적했다.

하나금융의 외환은행 인수설은 무게감이 떨어진다. 김종열 하나금융 사장이 최근 “외환은행 인수에 관심이 있다”고 했지만 인수 뒤에도 자산규모에서 4위인 건 마찬가지다. 하나금융 관계자는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지만, 기왕이면 더 이상 M&A 걱정이 없는 큰 곳과 하자는 분위기”라고 전했다.

우리금융의 셈법은 다르다. “왜 하필 하나냐”는 것이다. 이팔성 회장이 e-메일을 보낸 뒤 이종휘 우리은행장은 임직원들에게 ‘왜 하나는 아닌지’를 조목조목 설명했다. 증자할 돈을 마련하기도 힘들고, M&A를 주도할 내부 역량도 갖추지 못했다는 점 등이 거론됐다고 한다. 우리금융 관계자는 “민영화와 공적자금 회수 측면에서도 하나금융과의 합병은 가장 나쁜 선택”이라고 했다. 그는 “지분 맞교환 방식으로 하나금융과 통합하면 예보지분이 73%에서 44% 정도로 낮아진다”며 “신한이나 KB와 합병하면 이 비율이 훨씬 낮아져 지분 매각을 통한 민영화를 하지 않아도 된다”고 설명했다. “하나보다는 다른 은행과 합쳐야 회사 가치가 높아지고 주가가 올라 공적자금도 많이 회수할 수 있다”는 명분도 내세우고 있다. 이 회장도 정부 관계자 등을 만날 때마다 이 같은 논리에 바탕을 두고 “M&A가 아니라 민영화가 핵심”이라고 강조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외환銀 매각이 결정적 계기
선전포고는 했지만 아직 3차 금융대전의 총성은 울리지 않고 있다. 무엇보다 ‘실탄’이 아직 준비되지 않았다. 얼마 전 KB지주가 1조원을 증자했지만 은행을 살 만한 규모는 아니다. 하나금융의 2조원 증자설도 주가 하락 가능성 등으로 없던 일이 됐다. 정부가 ‘큰 그림’을 내놓지 않는 것도 은행들이 나서기 힘든 이유다. M&A에서 정부의 태도는 결정적 변수다. 금융위는 “금융산업 개편에 대해 아직 어떤 계획도 세우고 있지 않다”는 말을 거듭하고 있다. 이 때문에 내년 외환은행 매각이 ‘냉전’을 ‘열전’으로 바꾸는 계기가 될 전망이다. 금융권 관계자는 “중국과 동남아에서 자산이 1000조가 넘는 중국·일본의 거대 은행들과 경쟁하려면 자산 규모가 최소 400조원은 넘어야 한다”며 “국민은행이 외환은행을 인수한다면 ‘M&A에 더 이상 관심이 없다’고 해온 신한금융도 전선에 뛰어들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문제는 덩치를 키우면서 경쟁력도 함께 높여야 한다는 점이다. 세계 금융위기 이후 ‘규모가 곧 경쟁력’이라는 등식에 의문부호가 제기됐다. 씨티·BOA 등 M&A로 덩치를 불려온 세계 최대 은행들이 줄줄이 빈사상태에 놓였다. 씨티그룹식의 ‘금융수퍼마켓’ 전략도 한계를 드러냈다. 그렇다고 기존 모델을 대체할 새 모델도 아직 나오고 있지 않다. 금융연구원 김병덕 위원은 “투자은행(IB) 모델 등 월스트리트 방식에 의문이 제기되고 있지만 예대업무에 기초한 상업은행으로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규모의 경제는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세계 금융이 다시 기본으로 돌아가고 있다(Back to basic)”며 “덩치 키우기와 해외진출은 새로운 환경에서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는 유력한 전략”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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