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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천년 도전현장 -일본] 8. 아시아의 리더로, 세계의 주역으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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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일본의 심장부 도쿄(東京) 나가타초(永田町)1번지 총리부.

최근 몇달동안 이 건물 5층 한구석의 불이 꺼질 줄 모른다.

총리직속 '21세기 일본의 구상' 간담회 사무실이다.

도쿄역 앞 야에스 북센터 . 일본의 진로를 묻고 대답하는 책들이 넘쳐난다.

'21세기 유신(維新)' (문예춘추), '21세기를 사는 길' (고분샤)…. 숱한 월간지.무크지도 마찬가지. 학술단체나 연구모임의 주제도 '세계는 어떻게 변하고, 일본은 무엇을 할 것인가' 에 모아진다.

일본은 목하 고민 중이다.

21세기 세계속의 일본은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간담회가 개최된 것은 지난 3월. 내로라 하는 학자.전문가 51명이 참여했다.

이들은 외교.안보.사회.경제 등 5개 분과위로 나누어 일본의 21세기 청사진을 그리고 있다.

▶근대화를 가져온 메이지(明治)유신▶전후의 경제 번영에 이은 '제3의 개혁' 을 이끌어내려는 작업이다.

내년 1월까지 10만자 남짓의 보고서가 일어와 영어로 작성된다.

기초작업은 모두 끝났고 막바지 문안작업 중이다.

이번 보고서는 총리부가 주관하지만 일반국민의 의견까지 광범위하게 수렴했다.

민간인 2명과 관료 6명이 근무하는 상설 사무국을 둔 것은 이 때문이다.

와다 준(和田純)간담회 실장은 한달평균 5만여건의 시민의견이 접수된다고 말했다.

외교.안보를 다루는 제1분과위는 '세계에서 살아가는 일본' 이라는 대주제 아래 ▶국제관계의 변화▶국익▶중국의 정세▶한반도와 아태정세▶정보산업 발달 등의 소주제에 대해 논의해왔다.

오부치 게이조(小淵惠三)총리와 함께 여러 차례 머리를 맞댄 분과위원들이 제기한 방향은 대체로 다음과 같다.

일본의 기본적 국익은 자유무역 환경의 유지와 대미(對美)우호에서 찾아야 한다.

아태지역의 다국간 안보.경제기구를 주도하고 아시아 각국과의 관계를 보다 긴밀히 할 필요가 있다.

개도국 등을 경제적으로 지원할 수 있는 정부개발원조(ODA)의 힘도 적극적으로 활용하자. 중앙아시아의 자원을 겨냥한 유라시아 경제외교는 더욱 강화돼야 한다.

현재의 국제체제에서 중국이 일본의 안보를 위협하기는 어렵다.

중국은 잠재적인 경쟁상대일 뿐이다.

물론 유럽과 중동까지 포함하는 외교를 내세운 사람도 있었다.

경제대국이라는 말처럼 어느 한 분야에 치중하기보다 정치.군사.경제.문화 각 분야에서 고르게 힘을 키워가자는 중급국가론도 대두됐다.

그러나 분과위원들이 마련한 보고서 초안에 따르면 일본이 21세기에 구현하고 싶은 '세계속의 일본' 은 아시아.태평양을 축으로 한 글로벌 파워, 경제.평화 입국을 통한 정치대국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미국과 더불어 세계질서를 함께 구축해 나가겠다는 '공동패권' '대일본주의' 의 의지도 엿보였다.

그러나 이같은 목표는 세계의 보편적 가치를 토대로 한다.

지난 8월 21세기 구상에 참여하는 분과위원 전체 합숙회의에서 좌장인 가와이 하야오(河合□雄)국제일본문화연구센터 소장은 "지금은 화혼양재(和魂洋才.일본 정신과 서양 기술의 결합)로는 안된다.

화혼이 아닌 구혼(球魂.지구의 혼)이 돼야 한다" 고 말했다.

다시 말해 메이지 유신을 토대로 하는 지금의 일본을 뛰어넘어야 한다는 말이다.

분과위원들이 9~11월에 한국.미국.중국.싱가포르.유럽에서 각국의 정부당국자와 전문가들의 의견을 수렴했던 것도 같은 맥락이다.

한국에선 김종필(金鍾泌)총리 등을 만났다.

'20세기 일본' 의 극복에서 21세기의 구상을 찾으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사실 일본은 이같은 구도의 실현을 위해 안팎을 다져왔다.

우선 유엔안보리 상임이사국 진출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글로벌 파워로 가려는 핵심고리로 여기기 때문이다.

가맹국의 이해가 얽혀 6년동안 제자리를 맴돌고 있지만 일본의 노력은 집요하다.

올해 유네스코 사무총장.국제전기통신연맹(ITU)사무국장에 고위관리를 진출시킨 것 등이 그것이다.

'미스터 엔' 사카키바라 에이스케(□原英資)전 대장성 재무관의 국제통화기금(IMF)총재 당선에 팔을 걷어붙이고 나선 것도 마찬가지다.

내년 유엔의 밀레니엄 정상회담을 일본은 둘도 없는 호기로 여기고 있다.

안으로는 '안보체제의 빅뱅' 이다.

새 미.일방위협력지침(가이드라인)관련법 제정.유사법 제정 착수와 유엔 평화유지군(PKF).다국적군 병참지원 참가 검토가 그것이다.

국회에 헌법조사회를 설치한 것은 군사력 사용에 대한 평화헌법의 굴레를 벗어던지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한 것이다.

자위대가 아니라 군대를 갖는 보통국가가 되겠다는 것이다.

기타오카 신이치(北岡伸一)도쿄대 교수는 교전수칙(ROE) 정비 등이 다음의 과제라고 지적했다(외교포럼 99년 특별판).

일본은 마음만 먹으면 군사대국으로 급부상할 수 있다.

지금도 방위비 규모가 세계에서 세번째이고 최첨단 군사기술을 보유하고 있다.

일본의 극우세력은 왜 그렇게 못하느냐고 목소리를 높인다.

그러나 일본이 미국을 제치고 세계 1위의 군사대국으로 나설 수는 없다.

에바타 겐스케(江畑謙介) 군사평론가의 말처럼 오히려 미국과 일본의 군사력 격차는 계속해 벌어질 것이다.

과거사에 연결해 신국가주의의 경향을 우려하는 주변국들의 눈총도 부담스럽다.

따라서 군사력의 확충보다는 그것을 어디에 어떻게 쓸 것인가에 대한 국내외의 공감대를 단계적으로 넓혀가는 일이 더 시급해 보인다.

'안보 빅뱅' 의 과정은 대단히 제한적.단계적으로 추진될 수밖에 없을 것이란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일본은 아시아의 다자안보기구에도 적극적으로 뛰어들고 있다.

오부치 총리는 남북한.미.중의 4자회담에 일.러가 참가하는 6자회담을 입버릇처럼 되뇐다.

지난달 열린 동남아국가연합(아세안)+한.미.일 정상회담도 일본이 주도한 것으로 전해졌다.

어쩌면 일본은 지금 21세기만 고민하는 게 아닐지 모른다.

적어도 외교와 안보의 영역에서는 20세기 '부(負.잘못)의 유산' 을 덜어내는 일에 더 골몰하는 것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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