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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국에 묻어달라 유언 지키는 게 기념관 짓는 것보다 중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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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선데이, 디시전메이커를 위한 신문"

안중근 의사 숭모회 부회장인 김영광 전 의원은 “안 의사의 유해를 반드시 찾아 조국으로 봉환해야 한다”며 “보훈처는 1차 발굴 작업에 실패했다고 해서 포기해서는 안 되며, 2차 발굴 작업에 착수하기 위한 준비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신동연 기자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 뒀다가 우리의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返葬)해 주길 바란다. 나는 천국에 가서도 조국의 주권 회복을 위해 힘쓸 것이다. 만약 하늘에서도 조국 광복의 소식을 듣는다면 나는 혼령들과 함께 덩실덩실 춤을 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1909년 10월 26일 중국 헤이룽장(黑龍江)성 하얼빈(哈爾濱)역에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일본 추밀원 의장을 사살한 안중근(安重根) 의사. 그는 이듬해 3월 26일 뤼순(旅順) 감옥에서 교수형을 당하기 전 동생 정근(定根)·공근(恭根)과 홍석구 신부에게 이런 유언을 남겼다. 안 의사 의거 후 100년이 흘렀으나 그의 유언은 실현되지 않고 있다.

보훈처는 지난해 3월 안 의사의 유해를 찾기 위해 뤼순 감옥 북쪽의 야산 일대를 파헤쳤으나 유해를 발굴하는 데 실패했다. 보훈처는 2차 발굴작업을 실시할 계획은 잡지 않고 있다. 유해가 어디에 묻혀 있는지 정확히 알 수 없는 만큼 섣불리 발굴작업을 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일각에선 한국 정부가 안 의사 유해를 찾는 걸 포기했다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

그런 가운데 안 의사 유해 찾기에 35년 이상의 세월을 바친 이가 있다. 김영광(金永光ㆍ78) 안중근 의사 숭모회 부회장이다. 3선 의원을 지낸 그는 안 의사의 유해를 찾기 위해 미국에 사는 안 의사 손자 웅호(심장전문의)씨를 만났다. 그리고 유해를 찾아 한국으로 봉환해도 좋다는 위임장을 받았다. 이후 뤼순을 10차례 방문했다. 그동안 그가 쓴 사비는 2억원이 넘는다고 한다. 그는 23일 중앙SUNDAY와 인터뷰에서 “동토(凍土)의 땅에 외롭게 묻혀 있는 안 의사의 유해를 찾는 일을 결코 포기해선 안 된다”며 “그의 유언을 실현시켜 고혼(孤魂)을 달래 주는 일이 기념관 등의 건물을 짓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내 몸이 부서지는 한이 있더라도 꼭 유해를 찾고야 말 것”이라며 “지성이면 감천이란 말이 있듯 정성으로 최선을 다하면 좋은 결과를 낼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1차 발굴 땐 쓰레기만 나와”

김 전 의원(오른쪽)과 이국성씨가 8월 뤼순 감옥 옛 묘지터를 찾았다. 두 사람은 안 의사의 유해가 이 곳에 있을 가능성이 크다고 말한다.

-보훈처의 발굴작업이 왜 실패했다고 보나.
“유해가 묻혀 있지 않은 곳을 팠기 때문이다. 보훈처는 안 의사가 수감됐던 시절 뤼순 형무소장을 지냈던 사람의 딸 이마이 후사코(今井房子)의 증언에 기초해 발굴작업을 했다. 이마이는 자신이 8~9세였을 때 안 의사가 묻히는 곳을 봤다며 감옥 북쪽의 야산을 지목했다. 보훈처는 그 말을 믿고 땅을 팠으나 나온 건 사금파리를 비롯한 쓰레기밖에 없었다. 머리카락 등 유해로 볼 수 있는 어떤 흔적도 발견하지 못했다.”

-유해가 어디에 묻혀 있다고 보나.
“내가 국회의원으로 활동하던 83년 나는 서울 남산의 안중근 의사 기념관에 비치돼 있던 방명록을 보고 안 의사의 묘소를 직접 참배한 사람이 있다는 걸 알게 됐다. 방명록에 ‘안 의사 묘소 참배자 신현만’이라고 쓰인 글씨로 보고 나서 치안본부의 협조를 얻어 그를 찾아낸 것이다. 당시 54세였던 신씨는 해방 전 다롄(大連)에서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다녔다. 그가 43년 뤼순 감옥 근처 203고지로 수학여행을 갔을 때 안 의사 묘소를 찾아 참배했다고 한다. 그는 형의 말을 듣고 묘소를 찾아갔다고 한다. 그때 묘소엔 비목이 있었고, 한자로 쓰인 비목의 글씨 ‘안중근’ 가운데 ‘근’자가 부식돼 없어진 것도 목격했다고 한다. 내가 위치를 알려 달라고 하자 그는 감옥 정문에서 동쪽으로 500m쯤 떨어진 지점에 계단식 묘지가 있었고, 안 의사 묘소도 거기에 있었다고 했다. 올해 4월엔 54년 13세 때 안 의사 묘소를 참배한 적이 있다는 이국성이라는 분이 기자회견을 했다. 그의 증언도 신씨의 주장과 정확히 일치했다. 지난 8월 뤼순에 가 봤더니 신씨와 이씨가 가리킨 자리엔 ‘뤼순 감옥 구(舊)묘지’라는 돌로 된 표식이 박혀 있었다. 당시 나를 안내한 뤼순 박물관 관계자는 ‘한국 정부가 잘못된 곳에서 발굴을 했다. 이곳을 파 봐야 한다’고 말했다.”

-앞으로 어떻게 할 건가.
“안 의사 의거 100주년 기념 행사가 끝나면 보훈처에 2차 발굴작업을 하라고 촉구할 생각이다. 안 의사가 고국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긴 만큼 꼭 유해를 찾아야 하며 한 번 실패했다고 해서 체념하거나 포기해서는 안 된다고 말할 것이다.”

“남산 기념관 일본 학생이 더 많이 찾아”

-안 의사 유해 발굴에 특별히 관심을 가진 이유는 뭔가.
“47년 나는 수원농고 학생이었다. 당시 학교에선 광복 2주년을 맞아 안 의사를 소재로 한 연극을 무대에 올리기로 했고, 내가 주인공인 안 의사 역을 맡았다. 나는 정인보 선생이 쓴 ‘의사 안중근 전기’ 등을 읽으며 안 의사의 조국애와 기개를 배웠다. 연극은 대성공을 거뒀다. 특히 안 의사가 이토를 사살하는 클라이맥스는 청중의 앙코르 요청에 한 번 더 재연할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누구에게나 자신에게 큰 감화나 영향을 끼친 인물이 있기 마련인 데 나에게는 그런 사람이 안 의사다.”

-일본 총리를 지낸 모리 요시로(森喜朗)가 80년대 초 한국을 방문했을 때 안 의사 동상 앞에 고개 숙여 참배한 적이 있다. 그때 그에게 참배하라고 요구한 장본인이 김 의원 아닌가.
“82년 여름 일본 교과서 왜곡 사건으로 한국에선 반일 감정이 크게 고조됐다. 그때 스즈키 젠코(鈴木善幸) 일본 총리는 모리 등 자민당 의원을 특사로 한국에 파견했다. 그들은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한국 의원 중 교과서 문제와 관련해 가장 강경한 태도를 취하는 사람을 만나게 해 달라’고 당시 주한 일본대사에게 부탁했다고 한다. 나는 당시 ‘일본이 교과서 왜곡을 시정하지 않는 한 한국 의원들은 도쿄에서 열릴 예정인 한·일 의원연맹 총회에 참석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을 펴고 있었다. 그걸 아는 일본대사가 모리 등에게 나를 만나 보라고 했다 한다. 모리 등은 나를 만나자 교과서 왜곡 사건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설명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다가 일어서면서 ‘당신들이 교과서에서 일개 암살자로 못 박아 놓은 안 의사 동상이 남산 중턱에 세워져 있다. 당신들이 그 앞에서 참배할 때 나는 당신들의 얘기를 조금이라도 귀담아들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랬더니 다음 날 모리 등이 안 의사 동상 앞에 가서 참배했고, 중앙일보는 그 모습을 사진에 담아 보도했다.”

-안 의사 추모사업을 하면서 아쉽다고 느끼는 점은 없나.
“한국 젊은이들이 안 의사를 잘 모르고 있다는 점이 가장 안타깝다. 일본에서 서울로 수학여행을 오는 중·고교생은 반드시 남산의 안 의사 기념관을 찾는다. 반면 한국 학생의 발길은 상대적으로 뜸한 편이다. 대한 독립과 동양 평화를 위해 목숨을 바친 안 의사의 기개와 사상을 우리 젊은이들이 제대로 알 수 있도록 교육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상일 기자 leesi@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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