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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570. 아라리난장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7면

제13장 희망캐기 ⑤

승희가 그 남자에게 두려움을 가지지 않았던 것은 그 외양에서 풍기는 비하감 때문이었다. 이를테면 그는 사내가 가진 일반적인 통념에서 완벽할 만큼 벗어나 있다는 뜻이었다. 리어카에 붙어 서 있던 사내가 돌아왔다. 철 늦은 아이스크림이었다. 그 하나를 그녀에게 내밀면서 광장 가녘의 연석선을 가리켰다.

두 사람은 깔때기형의 과자컵에 넘치도록 담긴 아이스크림을 입에 물고 연석선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한결 편안했다. 광장을 오가는 사람들의 고단한 하반신들이 눈높이로 바라보였다.

여러 나라의 이름을 주워 댄 끝에 그가 싱가포르에서 온 관광객이란 것은 알게 되었지만, 그가 승희에게 어디서 왔느냐고 묻지는 않았다. 물론 물어 봤어도 대답하지 않았을 것이었다.

대다수가 중국 현지인들이었지만, 광장에는 많은 사람들이 북적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늦은 오후였는데도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승희는 생각하고 있었다. 입에 물고 있는 이 아이스크림을 다 먹고 나면 남자는 어떤 포즈를 보여 줄까. 그의 가슴 속을 들여다볼 수 없었으므로 그것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이스크림 먹기는 끝이 났다. 남자가 다 먹었다는 시늉으로 승희에게 두 팔을 벌려 보이고 나서 곧장 옆구리에 차고 있던 여행가방을 열었다. 그리고 골똘히 가방 속을 뒤지기 시작했다. 한동안 종이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사내가 꺼내 든 것은 중국 인형이었다. 손수건으로 입술 언저리를 훔치고 있던 승희는 그 인형을 스스럼없이 받아 들었다. 흙으로 빚은 그 인형은, 신깔개를 집어든 신기료장수의 형용을 본뜬 것이었다. 노인의 형용인데도 귀엽다는 생각이 들게 하였다. 그녀는 답례로 줄 것이 없다는 시늉을 보이자, 사내는 안심하라는 듯 그녀의 등을 가볍게 두드려 주었다. 아주 짧았던 순간이었으나 가슴이 뭉클했었고, 사내는 그녀의 곁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줄곧 승희의 시선을 따라 광장을 바라보며 넋을 빼고 앉아 있었다. 그가 일행으로부터 낙오되고 말았다는 확신이 들기 시작한 것은 그때부터였다.

그는 태호를 떠나온 자신처럼 무료하고 허탈한 낙오자의 시간을 보내고 있음이 분명했다. 그녀는 힐끗힐끗 남자를 엿보기 시작했다. 화덕 속에서 익어 가는 밀반죽처럼 미세하게나마 그의 형용이 처음보다 점점 부풀려지고 있었다. 물론 그를 선의의 시선으로 바라보려는 그녀의 착시였다. 저녁 어슴푸레하게 광장 저편으로부터 스름스름 밀려들고 있었다. 광장을 메웠던 인파들도 어느새 줄어들어 썰렁했다.

승희가 일어섰다. 그 남자도 당연한 것처럼 뒤따라 일어섰다. 광장을 가로질러 대로와 마주치는 지점에서 택시를 집어탔다. 두 사람은 그리고 당연한 것처럼 도시 변두리에 있는 반점으로 들어섰다. 그 빌딩 일층은 모두가 반점이었고, 그 가운데는 한글로 쓴 반점 간판도 보였지만, 그 쪽으로는 애써 눈길을 주지 않고 지나쳤다. 구태여 술청이 썰렁하게 비어 있는 식당을 찾아 두 사람은 맥주를 마셨다. 싱가포르에서 왔다는 이 남자를 떼어 버리자면 술에 취한 척해야 될 것 같았다.

남자는 중국말에 능통했다. 가다듬고 생각해 보았더니 그 나라에서도 중국어가 통용되고 있다는 얘기를 들은 것 같았다. 메뉴판을 꼼꼼하게 따져 가며 그가 시키는 요리들은 맛깔스러웠다. 느끼한 것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이 남자는 그녀가 한국 사람이라는 것을 일찌감치 간파했는지 몰랐다. 그러나 그게 대수인가. 다만 승희가 생각하고 있었던 것은 식당을 들어섰을 때의 작정과는 딴판으로 술을 마시고 싶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남자는 매우 친절했으면서도 아양을 떨지는 않았다. 촉촉하게 젖은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곤 하였다. 그녀와 자고 싶은 욕구가 있다는 것을 대뜸 알아차릴 수 있는 그런 눈이었다. 모멸감을 느끼기보다는 자연스런 욕구라는 생각이 얼른 머리를 스쳐갔다. 그가 주문해 준 요리 접시는 거의 비어 있었다. 마지막 한 컵의 맥주를 들이켜고 나서 승희는 의자에서 일어서며 남자의 손을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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