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이종찬씨의 처신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지금 정치권에서 빚어지고 있는 온갖 잡음과 난맥상은 상당 부분 이종찬(李鍾贊)씨와 연관된다. 국정원 정치개입.언론문건 의혹 등 세상을 어지럽히는 의혹의 한 가운데 전 국정원장이고 현 국민회의 부총재인 이종찬씨와 그 주변인물들이 얽혀 있다.

상황이 이런데도 李부총재는 진상을 속시원히 털어놓지 않고 변명만 일관한다는 인상만 준다. 본인이 기자회견을 갖고 석명(釋明)에 앞장서겠다니 일단 지켜보겠지만 전직 정보기관 수장(首長)이자 집권여당 고위간부라는 위상에 걸맞은 책임의식과 진상소명 의지가 엿보이지 않는 한 또다른 불신과 의혹만 증폭시킬 것이다.

국민 입장에선 무슨 '문건' 이 터졌다 하면 왜 꼭 李씨가 끼이느냐는 의문이 든다. 李부총재측은 언론문건은 한 기자가 멋대로 만들어 사무실로 보내온 것이고 그나마 읽어보지도 못했다고 말하고 있다.

국정원 6.3재선거 개입의혹 문건도 보좌관이 개인 차원에서 만들어준, 글자 그대로 '참고자료' 일 뿐이라는 설명이다. 이들 문건은 사무실에서 절취당한 것인데도 왜 그같은 불법행위보다 문건내용이 더 주목받아야 하느냐는 것이 李씨의 '억울한' 심경 토로다.

그러나 정치개입 금지를 규정한 국정원법을 위반하거나 언론장악을 시도했을 가능성이 있다면 문건의 내용과 작성경위도 분명하게 문제삼고 철저하게 파헤쳐야 마땅하다.

국정원장의 의전비서관이라면 의전업무에나 골몰할 일이지 어째서 선거 관련 문건을 만들고 야당의 당내 사정을 속속들이 알아내 보고하는가.

또 비서 한사람으로 가능한 일인가. 다수의 비서진이 동원됐다면 그들 또한 공직자들일 터인데 李원장은 이들을 사병(私兵)으로 부린 것인가. 아무리 정치인이라지만 연고지도 아닌 남의 지역구 재선거에 관해 사적(私的)으로 보고를 받을 만큼 국정원장 업무가 그토록 한가한가.

언론문건에 관해서도 김정길(金正吉)법무부장관은 그제 국회답변에서 "평화방송 이도준(李到俊)기자는 문건의 원본을 절취한 것이 아니라 복사본을 들고 나왔다" 고 확인했다. 그렇다면 李기자가 복사 후 李부총재 사무실에 그냥 두었을 원본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여기에 중앙일보가 보도한 대로 문일현씨가 작성한 문건과 李부총재 사무실의 문건은 글짜꼴이 다르다는 전문기관의 감식결과까지 나왔다.

누군가가 재작성했다는 또다른 의혹이 제기된다. 이런 의혹들에 대해 李부총재는 보다 명쾌하고 설득력 있는 답변을 내놓아야 한다.

李부총재로 인해 집권여당의 국정운영 전반에 차질이 빚어지는 모습을 대하면 딱하기 짝이 없다. 어떡하다 소속당내에서조차 '李부총재를 생각하면 머리가 아프다' 는 식의 반응이 나오게 됐는지 당사자가 곰곰이 생각하고 분명하게 처신할 일이다.

누구나 한번 말을 바꾸고 진실을 속이기 시작하면 매사가 꼬이고 뒤틀리게 마련이다. 의혹의 한복판에서 탈출하는 첩경은 원래의 진상을 그대로 밝히는 일이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