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세기를 넘어] 14. 소비의 사회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4면

중앙일보가 밀레니엄 기획의 일환으로 경남대(총장 박재규)와 공동으로 엮는 '세기를 넘어' 시리즈의 열네번째 주제는 '소비의 사회' 다.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현상은 기술 혁신에 따라 신상품이 쏟아져 나오고, 대량 생산이 대중소비를 가능케 했다는 점이다.

나아가 소비는 노동력의 재생산이나 욕망 충족을 위한 수단이라는 차원을 넘어 사회적 의사소통을 가능케 하는 '기호' 로 자리잡았다. 이에 따른 부작용이 확산하면서 '욕망과 소비의 악순환' 에 대항하는 운동들도 대두했다. 20세기, 특히 그 후반기가 왜 소비사회로 불리게 됐는지를 살피면서 미래를 전망해 본다.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우리는 어리둥절했다. 인민모를 쓴 마오쩌둥(毛澤東)의 대형 사진을 붙인 입간판이 중심가의 버스 정거장마다 세워져 있었기 때문이다.

문화혁명의 기억이 희미해진 지 오래고 사회주의가 붕괴한 게 10년 전인데, 아직도 毛를 숭앙한다는 말인가. 바르셀로나의 역사적 시간은 도대체 어디쯤 와있는 것인가.

그러나 사진을 찍으러 다가갔을 때 수수께끼는 풀렸다. 인민모에 선명히 박힌 부메랑 표지. 나이키의 광고판이었다.

반(反)자본주의 혁명가가 자본주의의 '전위' 로 등장하는 아이러니는 이 경우뿐이 아니다. 영국 런던의 하이게이트 공원에 있는 칼 마르크스의 무덤은 몇년 전 새 단장을 했다. 묘비에 새겨진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는 구절은 금빛으로 칠해졌다.

90년대 들어, 그 자신이 즐겨 썼던 표현대로 '죽은 개' 취급을 당해온 마르크스가 한 구석에서 이처럼 대접을 받는 것은 4파운드(약 7천6백원)나 되는 입장료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이 참배하러 오기 때문이다.

파리의 물랭 루주 근처 노점에선 전설적인 게릴라 지도자 에르네스토 체 게바라의 얼굴이 록 스타들의 사진틈에 끼여 손님을 부르고 있었다.

소비자본주의의 세계적 승리. 소르본 대학이 직영하던 서점이 폐점하고, 볼테르 동상 뒤의 책방 자리엔 토털 패션 GAP 체인점이 들어서는 시대다. 료타르의 설명처럼 지식의 상업화가 급격히 진행되면서 근본적 질문도 바뀌었다.

'무엇이 진리인가' 라는 고전적 물음을 제치고 들어선 '이것은 무엇에 쓰이는가' 라는 실용적 질문은 다시 '이것은 팔릴 수 있는가' 라는 자본의 심문(審問)에 쫓겨났다.

현대 사회에서 우리의 삶을 결정하는 것은 '소비' 이고 그 속에서 기존의 근대적 가치는 뒤집히며 비틀리고 있다.

장 보드리야르가 단정한 것처럼 상품은 기호가 되고, 그 기호의 '시뮐라시옹(模寫)' 만이 난무하는 사회여서일까. 미(美)와 추(醜), 좌와 우, 거짓과 진실 같은 대립항들이 서로 혼란스럽게 넘나들고 있다.

이제 나는 생각하므로 존재하는 게 아니다. 미국의 포토 몽타주 작가 바버라 크루거가 패러디했듯 '나는 쇼핑한다. 그래서 나는 존재한다' . 현대인은 끊임없이 소비하고 욕망을 교환하는 존재다. 자본주의는 모든 이에게 욕망의 방향을 정해 주고, 시장확대와 광고를 통해 소비를 채찍질한다.

'소비사회' 개념이 본격적으로 대두한 것은 서구가 물질적 풍요의 새 단계에 접어든 60년대 후반이다. 프랑스의 사상가 앙리 르페브르가 나날의 삶을 분석한 저서 '현대사회의 일상성' 을 출간한 것이 1968년이고 그의 제자 보드리야르가 '소비의 사회' 를 발표한 것이 1970년이다.

물론 소비는 '투자.생산.소비.재투자' 로 이어지는 자본순환 과정의 한 고리로 근대 자본주의 등장 이후 정치경제학의 주요 주제였다. 또 '미국의 경제학자 소스타인 베블런은 '유한계급론' 에서 소유욕을 '사치' 와 연관시켰으며, '독일 경제학자 베르너 좀바르트는 '사치와 자본주의' 에서 십자군 이후 만연한 사치와 낭비가 자본주의 체제를 탄생시켰다며 그것이 에로티시즘과 맺게 될 관계를 예견한 바 있다.

그렇다면 1960년대 후반엔 무엇이 달라졌길래 새삼 소비사회란 말이 부각됐을까. 그것은 이때쯤부터 '생산에 대한 소비의 우위' 가 뚜렷해지고, 소비가 우리 사회의 새로운 윤리이자 사회적 의례로 파악됐기 때문이다.

여기서 소비는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보드리야르에 따르면 소비자는 단순히 상품을 사서 쓰는 게 아니라 상품이 지니는 '기호가치' 를 소비한다. 소비사회에서는 사물이 본질적으로 기호가치를 갖는다는 얘기다.

디자이너 청바지의 값이 잘 말해주듯, 각종 상품의 가격은 이제 생산비나 사용가치로만 결정되지 않는다. 브랜드의 요체는 이미지를 만들어 주고 다른 사람과 구별시켜 주는 '상징' 이다.

소비사회는 상품이 기호(상징)가 되고, 기호가 상품이 되는 사회이며, 소비행위는 곧 기호를 통해 사회적 차이를 만들어 내는 행위다.

보드리야르는 이렇게 분석한다. "우리의 시대를 소비의 시대로 규정짓는 특징은 소비라는 일차적 수준이 기호체계로 재조직된다는 점이다. " 오늘날 패션.미디어.여가생활 등에 나타나고 있는 것처럼 기호의 생산과 소비는 의사소통의 과정이기도 하다. 이 과정을 확대 재생산하는 것이 광고다.

소비를 부추기는 광고와 선전은 나날이 새로운 기호들을 만들어 내면서 사회적 차별화를 촉진한다. 광고의 담론은 미(美)를 가치화한다. 패션이나 건강, 성과 관련한 상품을 소비해 자신의 육체를 타인의 육체와 다르게 만듦으로써 사람들은 행복해진다.

다이어트와 성형수술, 문신을 하고 귀.배꼽.코.혀, 심지어 성기까지 뚫어 장식용 고리를 끼운다. 육체를 도구화하는 것이다. 성의 상품화도 당연한 귀결이다. 문화비평가 존 버거의 지적처럼 '구매 능력이란 성적 만족감과 같다' . 소비사회의 등장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사람도 있다. '욕망의 해방' 이라는 점에서다. 모든 사람이 기호욕구를 누릴 수 있게 한다는 점에서 유행은 곧 민주주의의 확대라는 것이다.

세계적 디자이너였던 가브리엘 '코코' 샤넬은 새로운 패션이 '계급' 이라는 옷을 벗겼다고 말했다. 파리 패션이 대중민주주의에 적응하던 시점에 활동한 그는 "평균적인 여성을 위하여 옷을 만들어 왔다" 고 고백한 바 있다.

패션은 체제에 대한 저항의 커뮤니케이션이 되기도 한다. 1965년 영국의 메리 퀀트가 디자인한 미니 스커트는 '도발적 의상이라는 차원을 넘어서는 의미가 있었다. 히피 패션과 함께 '그것은'청년들이 집단적으로 발언하는 주요한 통로 구실을 했다.

그러나 보드리야르는 단호하다. "소비사회에서 욕구.소비자.여성.육체 등의 해방은 동시에 그것의 동원(動員)이다. 그 해방은 결코 폭발적인 게 아니며 관리된 해방, 즉 착취를 위한 동원일 따름이다. "

더욱 우려되는 것은 기호의 생산을 장악하고 있는 소수의 '기호 독재자' 들이다. 조지 리처(미 메릴랜드대.사회학)교수가 내놓은 '사회의 맥도널드화' 란 표현은 세계화한 소비자본주의에서 기호의 독재가 어떤 것인지를 한마디로 요약한다.

파리의 패스트 푸드 크루아상, 베이징의 켄터키 프라이드 치킨, 모스크바의 맥도널드 점포 앞에 줄을 선 사람들은 그 독재의 성실한 신민(臣民)들이다.

그러나 소비의 지배는 항상 권력투쟁의 장(場)에서 재확립돼야 한다. 프랑스 녹색당 당사에서 만난 자료담당 국장 알토 바타글리아는 말했다. "소비는 생산자와 소비자, 소비자와 소비자 사이의 권력투쟁을 낳고 있다. 소비자들은 자신의 선택을 통해 생산을 변화시킬 수 있을 뿐 아니라 연대를 통해 사회도 바꿔 나갈 수 있을 것이다. "

파리.런던.바르셀로나〓김재현(경남대.철학)교수, 김창호 학술전문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