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557. 아라리난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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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6면

제12장 새로운 행상 (35)

숙소로 찾아든 것은 새벽 두시를 넘긴 시각이었다. 불이 켜진 방안으로 들어서는데, 눈을 빤히 뜨고 천장을 바라보고 누웠던 형식이가 얼른 벽쪽으로 돌아 누웠다. 한마디 건넸으나 대꾸가 없었다.

변씨가 수감생활로 들어간 이후부터 형식이도 덩달아 예민해졌다는 것을 잠시 잊고 있었다. 밤이든 낮이든 혼자 있는 것이 두려운 것이었다. 술냄새를 풍기면서 이미 깔아둔 이부자리 속으로 기어들어 몸을 떨었다. 그와 때를 같이하여 형식이가 벌떡 일어나더니 쏘아붙이듯 마른 코를 팽 소리나게 풀었다.

자기 나름대로는 성깔도 있고 자존심도 없지 않다는 시위가 분명했다. 연민이 술 취한 가슴을 쓸고 지났다. 형식이마저 곁에 없었더라면 누굴 의지하고 지탱해 나왔을까. 벌떡 일어나 끌어안아 주고 싶었지만 주정 부린다는 핀잔이나 받을 것 같았다.

"내일은 정읍으로 떠난다. "

"두 시간도 못 자겠네요. "

"야 임마. 두 시간이면 됐지. 뜨내기 행상꾼 주제에 밤마다 코가 비뚤어지도록 잘래?"

난데없는 화를 벌컥 돋우고 정수리 끝까지 이불을 뒤집어 써버렸다.

자신을 향해 입을 비쭉하는 형식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정읍은 처음 찾아가는 고장인데도 왜냐고 되묻지 않았다.

정읍장을 찾기로 작정한 것은 식당에서 들었던 방극섭의 이야기 때문이었다.

집에서 기르던 개를 데리고 정읍시장으로 나갔던 주인이 돌아오는 길에 술에 취해 산기슭에 쓰러져 잠이 들고 말았다. 그 사이에 공교롭게도 산불이 일어났고, 위험을 알아챈 개는 꼬리에 물을 축여 주인을 불길에서 구해내고 자신은 죽고 말았다는 의견(義犬)의 이야기였다.

그뿐 아니라, 행상길을 떠나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는 남편의 밤길을 걱정해 백제의 아낙네가 지었다는 정읍사(井邑詞)가 떠올랐다.

스산하고 허망한 가슴에 섬뜩하게 다가오는 이야기들이 고여 있다는 정읍을 보고 싶었다.

취해서 잠이 든 한철규를 깨운 것은 형식이었고, 선잠이 깬 한철규에게 옷을 입혀 준 것은 방극섭이었다.

세 사람이 무료 주차장인 정읍천 고수부지에 도착한 것은 아침 7시쯤이었다. 정읍의 장시는 두 곳이었다. 구시장으로 불리는 제1시장은 상설시장이었고, 제2시장으로 불리는 정읍천 제방 아래의 연지동(蓮池洞)시장이 5일장 구실을 하고 있었다.

상설시장인 제1시장까지 합치면 규모에서 전라도 내륙에선 제일가는 장시라 할 만했다. 어물시장을 한 바퀴 휘 돌아보았다. 영암이나 영산포에서 보았던 홍어나 어패류도 많았지만, 내륙시장답게 갈치나 고등어 같은 어물들도 좌판에 올라 있었다.

이채로운 것은 풍물에 쓰이는 옛 악기들을 팔고 있는 가게들이 장옥이 비좁게 들어앉아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놀란 것은 고추전이었다. 호남의 고추시장으로선 임실의 관촌장과 영광의 영광장을 손꼽고 있지만, 충청도 상인들까지 모여들어 북새통을 이루는 고추전은 정읍장뿐이었다.

마침 성수기를 맞아 고추전은 이른 아침부터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영양의 고추전을 경험했었지만, 규모에 있어선 정읍의 고추전을 따를 수 없었다. 지난해 영양고추를 도매해 잇속을 톡톡히 보았던 미련이 남았던 한철규는 오전 내내 고추전 어름에서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방극섭과 형식이가 좌판을 편 고흥산 마늘은 매기가 신통치 않았다. 점심시간이 임박해서야 좌판으로 돌아온 한철규가 방극섭의 의향을 물었다.

"방형, 곧장 집으로 돌아갈 작정이요?"

"왜? 잇속 차릴 만한 구멍이라도 있었어라?"

"정읍에 숙소를 정하고 차떼기로 고추장사 벌여 봅시다. 신태인과 칠보면이며 순창이며 고창같은 고추산지에서 출하된 고추들이 정읍에서 거래되고 있어요. 마침 끝물 때여서 성수기가 오래 가진 않겠지만 서너 장도막 동안 바쁘게 설치면 재미를 볼 것 같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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