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청소년 해방구'라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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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인천 호프집 화재사고는 대형 참변 때마다 지적되는 우리 사회의 고질적인 안전불감증과 함께 일그러진 청소년문화를 생각케 한다. 화재 당시 '라이브 호프집' 에서 술을 마시던 1백여명의 손님 대부분이 고교생이었다는 사실은 충격적이다.

그들은 학교 축제 뒤풀이를 위해, 생일파티를 위해, 혹은 미팅을 하러 그곳으로 몰려갔다고 한다. 어린 학생들이 특별한 행사를 위해 선택한 장소가 제과점이나 음식점이 아닌 유흥가의 술집이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불이 난 호프집뿐만 아니라 그 일대가 10대 청소년들을 주 고객으로 하는 노래방.게임방.콜라텍.호프집.소주방 등이 몰려 있어 평소에도 학생들로 북적거렸다는 점이다. 약간의 돈만 있으면 언제든지 찾아가 친구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고 노래하며 즐길 수 있는 곳이라고 한다.

누구도 주민등록증을 보자고 하지 않고 술에 취해 비틀거려도 나무라지 않는 곳, 그곳은 마음대로 끼를 발산하고 때로는 적당히 어른 흉내를 낼 수 있는, 청소년들에게는 '치외법권 지역' 인 셈이다.

이름하여 '청소년 해방구' 라고 불리는 이런 지역이 전국 대도시 곳곳에 자리잡고 있다는 사실은 이제 더 이상 모르는 체 덮어둘 수 없는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어린 학생들을 유해환경으로부터 차단하기 위해 청소년보호법까지 만드는 마당에 한쪽에서는 '청소년 해방구' 가 형성되는 현실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호프집 화재참변은 청소년 문제가 법이나 제도만으로는 해결될 수 없는 것임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 이전에 청소년들의 욕구와 고민을 이해하고 그것을 정상적으로 흡수할 수 있는 어른들의 자세와 사회적 여건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그같은 노력이 없는 상태에서 규제만 만들고 일부 어른들은 검은 상혼에 눈이 어둡다보니 '해방구' 가 만들어지고 그곳에서 대형사고가 발생하는 것이다.

잘못된 청소년문화를 바로잡기 위해서는 가정과 학교와 사회가 사회 변화에 따라 달라진 청소년들의 가치관부터 이해해야 한다.

그들의 생각은 5년 전, 10년 전과도 달라지고 날로 더욱 다양해지고 있다. 직업관부터가 부모들과 다르다. 또 그들의 행동은 예전보다 훨씬 즉흥적이고 거침이 없다. 세대차라고 설명하기엔 부족할 정도로 변화의 속도가 빠르다.

최근 언론을 통해 집중 보도되고 있는 심각한 교실붕괴 현상이 달라진 그들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면 그들의 여가.공간.놀이에 대한 욕구도 기성세대의 잣대로만 볼 것이 아니다.

술이나 담배 등 유해환경에 대한 사회적 기준은 엄격하게 설정하되 그들이 건전하게 즐기면서 욕구를 발산할 수 있는 환경은 제대로 갖춰줄 필요가 있다.

지금은 온통 어른들만을 위한 공간뿐이니 문제가 자꾸 악화되는 것이다. '해방구' 단속은 강화하되 대신 건전한 '청소년 공간' 을 만드는 사회적 노력이 시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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