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영빈칼럼] 기념관인가 기록관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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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논쟁 과잉시대다. 토론문화 부재라고 개탄하던 때가 엊그제인데 이젠 토론.논쟁.분쟁이 넘쳐나서 큰 일이다.

토론 자체가 소모적 성격을 조금은 띤다고 보지만 우리 사회에 진행 중인 논쟁들은 너무 양극적이고 소모적이어서 논쟁을 위한 논쟁, 이해 당사자간의 패거리 싸움으로 변질되는 양상마저 보이고 있다.

단군상 논쟁에서 동강댐 논쟁.낙동강 물대책 분쟁에 이어 최근 다시 '박정희(朴正熙)논쟁' 이 불붙고 겸해서 박정희기념관이 논쟁의 대상으로 떠올랐다.

토론이 쟁점화되면 논쟁이 되고 논쟁이 격해지면 분쟁이 돼 결국 패싸움 비슷하게 진행되는 게 우리식 토론문화라고 할 수 있다.

개인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더더욱 어렵다. 더구나 정치지도자.전직 대통령에 이르면 평가기준이 한가닥으로 잡힐 수 없다.

이해 당사자가 수없이 살아 있는 사후 20년 시점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평가는 객관화되기 어려운 대상이다.

산업화 측면에서 보면 위대한 지도자고 민주화 측면에서 보면 개발 독재자일 뿐이다. 워낙 공과(功過)가 뚜렷한 인물이니 토론과 논쟁으로 합의 도출을 내리기 어렵다. 따라서 평가 결과에 따라 기념관이나 기록관을 지을지를 확정한다는 것 자체가 끝없는 논쟁의 연속일 뿐이다.

명분론에 집착하는 논쟁에서 벗어나 왜 대통령기념관 또는 기록관이 필요한지 실용적 측면에서 먼저 접근해야 한다.

우선 대통령기념관 (Presidential Memorial)과 대통령기록관(Presidential Library)의 차이를 분명히 해야 한다. 우리에겐 선례가 없으니 미국 예를 보자. 미국 대통령기념관은 제퍼슨.링컨.프랭클린 루스벨트 등 소수의 대통령에 국한돼 있다.

역사적 평가가 내려진 시점에서 국민적 합의로 추앙할 수 있는 지도자를 선정해 기념하는 전시장이다. 기념관 건립비용은 당연히 국민의 세금을 모은 정부예산으로 건립된다.

최초의 대통령기록관은 루스벨트 대통령이 현직에 있으면서 본인의 소장문서를 뉴욕 하이드파크에 문서고를 지어 보관하겠다는 뜻에서 시작됐다.

건립추진위원회가 모금운동을 벌이고 학자들로 구성된 자문위원회가 문서의 분류.정리.체계화를 맡았다. 40만달러 모금으로 기록관을 지은 뒤 그의 재임시 발족한 국립기록관리청(NARA)에 운영을 맡겼다.

이 기증식에서 루스벨트 대통령은 "과거를 믿어야 한다. 미래를 믿어야 한다. 국민이 과거로부터 배워 그들의 미래를 창조하는 판단력을 가질 수 있게 해야 한다" 는 명연설을 남겼다.

이후 미국 역대 대통령은 기념관이 아닌 10개의 대통령기록관을 남기고 있다. 닉슨 기록만이 국립기록관리청에 보관.열람되고 있다. 대체로 건립 추진방식이 모금에 의존한다. 주정부가 토지를 제공하거나 대학이 캠퍼스 부지를 제공한다.

부시 대통령의 경우 4개 대학이 유치경쟁을 벌여 텍사스 A&M대학이 선정되기도 했다. 기록관이 건립되면 운영은 국립기록관리청이 맡아 일체의 문서와 오디오.비디오 자료를 분류.정리하고 연구자료로 활용한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기념관인가 기록관인가. 나는 지난 4월 '대통령자료관을 짓자' 는 제안을 한 바 있다. 대통령자료란 현대사 자료로서 가장 귀중한 공적 재산이다.

대통령 개인의 사유물이 아니다. 전화 한통화.비망록.메모 한장.정책결정 관련 자료 모두가 역사물이고 국민의 소유물에 속한다. 이를 정리하고 후대에 남겨야 미래를 창조할 국민 능력을 키운다.

조선조에는 실록청(實錄廳)이 있어 임금의 말과 글, 통치자료 일체를 남겼다. 객관성을 살리기 위해 사관(史官)은 집안에서 남몰래 가장사초(家藏史草)를 기록했다가 왕의 사후 실록에 남겼다.

통치자의 기록물 엄중관리는 통치자의 행동과 정책에 대한 소리없는 견제이면서 바른 길을 안내하는 방향타가 될 수 있다. 국민이 언제나 나를 지켜보고 평가한다는 제도적 견제기능을 갖는다.

목포대 박찬승(朴贊勝)교수가 제안했듯 대통령기념관이 아닌 역대 대통령기록관 건립이 우선 시급하다. 기념관 건립은 그다음 일이다.

미국과 달리 민간 모금으로 대통령기록관을 짓기엔 아직은 역부족이다. 지금 정부는 민간주도의 박정희기념관 건립에 1백억원을 지원하기로 했다.

앞으로 6백억원이 더 소요된다고 했다. 이럴 바엔 역대 대통령 모두를 포함한 대통령기록관을 짓는 게 순리에도 맞고 경제적으로도 효과적이다.

대통령 개개인의 기록관을 별도로 짓는 단독주택형보다 연립주택형을 취하자는 것이다. 이런 형식이면 왜 초대 대통령은 빼고 박정희 대통령만이냐는 항의도 사라지고 형식적 기념관이 아닌 내실있는 대통령기록관으로 기능할 수 있다.

권영빈 논설위원 겸 통일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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