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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를 넘어] 2. 레닌주의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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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중앙일보가 밀레니엄 기획의 일환으로 국내외 약 30여명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경남대(총장 박재규)와 공동으로 기획.취재한 이 연제의 두번째는 '레닌주의' 다.

20세기는 자본주의적 근대화의 내적 모순이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남과 아울러 그 대안도 가장 적극적으로 시도된 기간이었다.

그 중에서도 1917년의 러시아 혁명은 20세기에서 시공간적으로 가장 심각하게 그 대안 모색이 시도된 사건이다.

약 70여년 동안 지구의 절반을 차지한 현실사회주의를 낳았던 러시아 혁명, 그것을 가능케 한 것은 다름 아닌 레닌주의였다. 레닌주의의 과거와 현재를 살펴본다.

햇빛 화창한 초가을 모스크바-. 크렘린 광장과 그 뒤편의 알렉산드로프스키 정원에도 초가을의 햇빛이 선연하게 내리 꽂히고 있었다.

현실 사회주의를 상징하는 이곳. 그러나 이젠 사람들도 풍경도 사회주의는 아니다. 서구의 여느 도시와 다르지 않은 화려한 옷색깔과 사람들의 움직임이 그랬다.

시인 푸슈킨이 하얗게 곧게 뻗은 자작나무에 비유했던 '처녀의 아름다운 종아리' 를 드러낸 짧은 미니스커트의 행렬은 더욱 그랬다.

물론 아직도 전철 속에선 현실 사회주의와 탈(脫)사회주의가 '세대차' 속에서 여전히 공존하고 있었다.

딱딱한 의자와 얼굴을 찌그려뜨려 비춰주는 유리창, 잿빛 정장을 가지런히 차려입은 노신사와 머리끈을 질끈 동여맨 억센 슬라브 어머니가 사회주의였다면,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는 젊은이들의 입맞춤과, 롤러블레이드를 신고 소란스레 장난치는 10대는 탈사회주의의 증거였다.

이같은 겉모습과 달리 러시아 사회엔 지금 금융.토지투기꾼, 국영기업 불하로 부를 축적한 소수의 '신(新)러시아인' 들과 숙명주의에 길든 광범위한 대중만이 있을 뿐이다.

최근 CNN 특집기획 프로그램의 예고문구처럼 "차르에게 속았고 공산주의에 속았고, 이제 자본주의에 속았다" 는 생각 때문일까. "러시아인들은 의외의 결정에 너무 익숙해져 오늘 저녁 대통령이 '일식을 연기하라' 고 지시해도 놀라지 않을 것" 이라는 신문만평은 러시아 사회에 만연한 절망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숙명주의는 그 대립물인 극단주의를 불가피하게 불러오고 있다. 코소보 사태 이후 벌거벗은 모습으로 확산돼온 슬라브 민족주의는 러시아의 전통적 극단주의에 대한 지식인들의 경계심을 자아내고 있다.

"균형을 유지해온 중국문명과 달리 러시아의 정치문화는 언제나 극단을 오가는 전통이 있다" 고 설명한 러시아 외교아카데미 예프게니 바쟈노프 부원장이 '극단주의와의 투쟁' 을 러시아 사회의 가장 중요한 과제로 제시한다.

러시아 지식인들의 스탈린에 대한 극도의 혐오도 자신들 내면에 자리잡은 극단주의에 대한 경계로 읽혀졌다.

이 지점에서 러시아 사회는 약 90년 전의 레닌과 다시 맞닥뜨리게 된다. 레닌이 '무엇을 할 것인가' 에서 치열한 비판을 토해냈던 인민주의자(나드로니키)들의 숙명주의 및 극단주의와 다시 대결해야 하는 상황을 맞고 있다.

인민주의자였던 형이 차르를 암살하려다 처형당했던 레닌 자신의 경험은 러시아 현대사를 관통하고 있는 것이다.

레닌주의는 한마디로 서방의 민주주의 전통에 기반한 마르크스주의와 러시아의 후진성과 전제주의적 문명의 결합물이었다.

잔혹한 전제체제를 뒤엎지 않고서는 근대적 국가 건설이 불가능한 상태에서 레닌이 선택한 것은 서구와 '다른 길' 이었다.

자본주의를 거쳐 사회주의로 발전한다는 경제결정론을 거부하고 민주주의와 사회주의의 동시혁명을 추진했던 것이었다.

표트르 대제가 시작한 서구화는 부농과의 계층분화와 약탈적 자본주의의 이식을 낳았으며, 그것을 했던 차르의 잔혹한 전제정치도 계속됐다.

여기에다 세계자본주의 체제의 위기로 표출된 1차 세계대전은 러시아 혁명이 불가피하도록 강제했다. 레닌 자신의 말처럼 "세계적 자본주의의 가장 약한 고리를 뚫고 나온 것" 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20세기 최대의 반(反)자본주의 실험은 저명한 역사학자 카(E H Carr)가 그의 역작 '러시아 혁명사' 에서 쓴 것처럼 '썩은 문짝을 차고 나오듯이' 일어났다.

볼셰비키가 멘셰비키.의회민주주의자들과 함께 일으킨 2월혁명(1917년)이 성공하자 레닌은 4월 3일 망명지 핀란드에서 기차로 귀국한다. 니콜라이 2세의 연인이었던 크셰신스카야라는 폴란드 출신 발레리나 집(현재 러시아 정치사박물관)에 은신해있던 레닌은 1917년 10월, 페트로그라드 수비대가 동궁(冬宮)을 향해 발사한 단 2발의 포로 볼셰비키 혁명에 성공한 것이다.

후진적 전제국가에서 일어난 혁명은 하나의 '이변' 이었다. 자본주의를 거치지 않은 사회주의 혁명은 이탈리아 마르크스주의자 안토니오 그람시의 지적처럼 '자본의 법칙을 배반한 혁명' 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바로 그곳에 있었다. 차르의 잔혹함과 사회체제의 낙후성에서 야기된 혁명은 결과적으로 '슬라브주의적 전제정치의 부활' 이라는 비극을 만난다.

내전과 자본주의에 포위된 위기상황에서 등장한 스탈린의 공포정치는 레닌 사망(1924년) 직전 시장경제를 통해 사회주의를 발전시려는 '신경제정책' 의 빛을 바래게 했다. 이후 70여년간 소비에트 권력 아래서 마르크스-레닌주의는 사실상 소비에트 제국주의를 정당화하는 논리가 돼버렸고, 결국 계획경제가 가져온 완전고용의 비생산성과 관료화된 노멘클라투라로 붕괴하게 됐다.

이런 기억 때문인지 러시아인들에게 레닌은 스탈린과 별개였다. 레닌 묘 앞에서 만난 러시아인들은 세대와 상관없이 '스탈린은 웃기는 사람' '레닌을 좋아한다' 고 입을 모았다. 심지어 아직 공산주의자로 자처하는 사람들도 다르지 않았다.

레닌이 다시 태어난다면 "당신들은 도대체 무슨 짓을 했소" 라고 질타할 것이라는 알렉산드르 샤바노프 공산당 중앙위 위원의 설명이 그랬다.

러시아 사회가 가장 고민하는 것은 전망의 부재다. 지금 러시아 사회에 만연하고 있는 숙명주의와 극단주의도 그 연장선상에 있다. 물질적 생산력이 높아짐에도 그것이 곧 사회의 질, 삶의 질이 높아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 고민의 핵심이다.

신세대 지식인 이고르 제벨로프 박사(미 매컬리스터대 정치학과 교환교수)의 단정처럼 사회주의도 자본주의도 그 고민에 대한 대답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단지 빅토르 쿠발딘 교수(고르바초프재단 정치학 센터소장)는 "레닌이 지금 다시 태어난다면 혁명가가 아니라 개혁가일 것" 이라는 가정은 현재 그들이 선택할 수 있는 선택의 폭을 암시해줄 뿐이다.

레닌주의 그 자체는 러시아인들에게 지나간 역사일 뿐이다. 그러나 레닌이 비록 실현하지는 못했지만 레닌주의가 표방한 평등과 정의의 사상이 러시아 사회의 바탕을 이룰 것이라는 점에는 러시아 지식인 사이에 이견이 없다.

취재진에게 혁명기념일이 '화해와 화합의 날' 로 지정됐다며 이번 레닌에 대한 기사가 "평화로 끝을 맺었으면 한다" 는 현역 육군대령의 간곡한 부탁도 실패로 끝난 듯한 러시아 혁명이 러시아에서 어떻게 다시 현재화되고 있는가를 가늠케 해준다.

모스크바.페테르부르크〓손명곤 교수(경남대.러시아학).김창호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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