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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틀거리는 동구] 10. 향락.퇴폐산업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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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9월 5일 일요일 자정. 체코 민주화의 성지로 불리는 프라하의 바츨라프 광장. 가로등 기둥이나 건물 벽 사이 사이에는 손바닥만한 광고지를 든 호객꾼들이 진을 치고 있다.

수없이 달라붙는 이들의 치근덕거림에 행인들은 곤욕을 치러야 한다. 대부분 술집 삐끼들이며 개중엔 아예 호텔행을 권하는 여성들도 있다.

이들이 노리는 주고객은 외국인들. 영어로 말을 걸다 반응이 없으면 곧 독일어나 프랑스어.스페인어로 호객을 한다.

일본어도 빠지지 않는다. 일반 상점과 음식점 사이에 아무렇지도 않게 자리잡은 섹스바 '파라다이스' 는 우리 돈으로 5천원만 내면 누구나 입장할 수 있다.

웨이터들이 총기 사고를 우려, 몸수색을 하지만 연령확인은 없다. 계단을 따라 내려간 20평 남짓한 지하홀엔 1백여명의 손님들이 빼곡이 들어서 북적거렸다.

빈 좌석은 아예 없고 옮겨 다니기도 어려울 정도다. 홀 중앙에 마련된 원형무대에선 전라(全裸)의 무희가 현란한 춤을 춘다. 손님들은 서로 무대 바로 앞자리에 앉으려고 다투는가 하면 테이블 사이론 속이 훤히 보이는 반라의 여종업원 20여명이 손님들과 몸을 부딪쳐가며 열심히 주문을 받고 술을 나른다.

홀 한편 쪽문으로도 사람들이 부산하게 드나든다. 웨이터는 "간이 수영장에 물침대까지 갖춰진 밀실" 이라며 은근히 자리를 옮기라고 권유한다. "미끈한 미녀가 기다리고 있어요. 하루밤 80달러면 비싼건 아니잖아요. " 평균 월급 3백~4백달러인 체코 샐러리맨들에겐 문턱이 높은 집이다. 외국인들이 주고객이다 보니 안내와 DJ의 멘트는 영어다.

영업시간은 오후 6~7시부터 다음날 오전 7시까지. 관광객들 중에선 아예 이곳에서 밤을 보내고 다음날 관광에 나서는 사람들도 많다는 게 웨이터의 귀띔이다.

바츨라프 광장 주변에만 이런 술집이 10여곳이나 된다. 동구가 서구인들의 욕망을 배출하는 쓰레기장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미국의 경제 전문지 포천(6월 14일자)은 헝가리가 유럽 섹스산업의 중심지가 된 지 이미 오래라고 꼬집었다.

헝가리의 포르노 비디오 제작업체 탑 에이전시의 실비아 케레케스는 "헝가리의 아름다운 경관과 낮은 임금, 쉽게 돈을 벌려는 젊은 남녀로 인해 포르노 산업이 번성하고 있다" 고 털어놓았다.

90분짜리 비디오 제작비는 서구의 절반에도 못미치는 1만7천달러(약 2천만원)수준이다. 서구인들의 욕망을 상대로 돈벌이에 나선 여성의 수는 서쪽 국경으로 갈수록 더하다. 독일과의 접경지역인 체코 북부 테블리체의 E55번 도로변에는 밤이면 3㎞에 이르는 인간띠가 형성된다.

몸을 파는 여성들이다. 일부 대학생들은 이곳에서 돈을 벌어 서구로 유학을 떠난다고 한다. 생활고를 덜고자 나온 주부들도 끼여 있다.

옛 소련에선 향락.퇴폐문화는 '인민의 정신을 갉아먹는 대표적인 자본주의 산업' 으로 지목돼 철저하게 단속됐다. 그러나 소련이 해체된 뒤 러시아에선 현재 향락산업이 절정을 이루고 있다.

야한 성인잡지가 넘쳐나고 청소년잡지에까지 적나라한 성행위 묘사가 버젓이 등장한다. 플레이보이 등 외국계 성인잡지는 점잖은 편이다. '안드레이' '스피드 인포(주간지)' 'XXL' 등 러시아잡지들이 더 노골적이어서 서구잡지보다 인기가 높다.

경제난과 마피아들의 조직적 활동으로 서구 매춘조직에 팔려가는 러시아여인들이 계속 늘어나는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한국에서도 여러차례 사회문제화됐지만 미국의 뉴욕 브라이튼 비치도 러시아 여인들의 활동장소로 유명하다.

사우나탕 등에서의 음란산업도 성행하고 있다. 유리 수쿠라토프 검찰총장은 지난 3월 사우나에 딸린 별실에서 2명의 여인들과 함께 침대에 있는 모습이 비디오로 공개돼 사퇴압력에 시달렸다.

98년 초에는 발렌틴 코발료프 법무장관이 똑같은 케이스로 사임했다. 퇴폐.향락산업이 국가 지도부에까지 깊숙이 파고들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퇴폐.향락문화는 러시아의 부패와 연관돼 있다. 자본주의 법칙이 제대로 이행되지 못하면서 이권이 정실에 의해 나눠지다 보니 향락 접대문화가 만연하고 있다는 것이 러시아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최근에는 유흥업의 서진(西進)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더 나은 수입을 위해 유흥업소 여종업원들이 서쪽으로 옮겨가고 있는 것이다.

폴란드 유흥업소에는 폴란드보다 경제수준이 낮은 우크라이나.벨로루시.러시아 여성들이 주류를 이룬다. 폴란드 여인들은 독일로 향하고 있다고 한다. 바르샤바의 술집에서 만난 한 우크라이나 출신 무희는 "폴란드보다 수입이 좋고 근무조건이 좋은 이탈리아나 독일로 진출하는 것이 꿈" 이라고 말했다.

동구 각국이 너나없이 서방정책을 외치는 이면에서 생활고에 시달리는 여성들은 서구로 가는 마지막 비상구로 향락산업을 택하고 있는 것이다. 향락산업의 만연은 가뜩이나 혼란스러운 사회질서를 더욱 꼬이게 하고 있다.

청소년들의 정서를 해친다는 등 자성.비판의 목소리도 점차 높아가고 있지만, 돈이 최상의 가치로 떠오르고 '통제는 모두 악(惡)' 이라는 의식 때문에 정화작업이 쉽지 않은 상태다. 고삐 풀린 유흥산업이 동구의 미래마저 옥죄고 있는 셈이다.

◇ 특별취재팀〓김석환.배명복 특파원, 채인택.최준호. 김영훈 기자

◇ 협찬〓삼성언론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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