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시평] 작은 조각, 큰 그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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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한가지를 알면 열가지를 아는 재간이 중요한 경우가 있다. 판단이 그릇돼도 뒤탈이 적은 재치문답 게임에서는 척 보면 삼천리를 내다보는 눈치가 승부를 좌우한다.

반면 열가지를 알아야 겨우 한가지를 제대로 판단할 만큼 감질나도록 굼뜬 심사숙고가 요구되는 경우가 있다. 시비의 판가름이 중대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을 사안은 돌다리도 두드리듯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

최근 한국전쟁 중 미군 양민학살 사건이 대서특필되고 있다. 참전 초기 미군이 노근리 주민을 남녀노소 가림없이 무차별 사살했다고 한다.

버나드 대령의 LA타임스 기고문에 따르면 당시 정신무장이 해이한 미군이 바추카포에도 끄덕없는 북한군 탱크와 피란민 행렬에 숨어든 공비들의 위장침투를 두려워했던 게 원인으로 추정됐다.

다른 증언에 따르면 북진 중에도 유사한 사건이 두어 건 더 있었고, 상부에 보고했으나 함구지시가 내려졌었다고 미국 CBS 방송이 보도했다.

한국 정부는 공식적 사건조사에 착수했다. 윌리엄 코언 미 국방장관은 우선 노근리 사건에 조사의 초점을 두어 진행하되 증거가 드러나면 다른 사건도 조사해 나가겠다고 했다.

전쟁은 흔히 선과 악의 대결로 미화되지만 그 와중에서는 피아(彼我)가 모두 그때그때 그럴싸한 전술적 이유로 크고작은 비이성적 만행들을 수없이 저지르게 마련이다.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승리해야 하는 게 전쟁이다.

쓸데없이 적에게 아량을 베풀다 패망한 중국 춘추시대 송나라 양공(襄公)은 역사의 웃음거리다. 백마고지는 평화시의 덕목으로 쟁취된 것이 아니다.

전시에는 흔히 이성적 판단이 마비된다. 6.25를 경험한 세대는 군인이 아니더라도 북한군의 피란민 위장침투를 눈으로 귀로 보고 들었던 일이다. 이를 저지하기 위해 미군이 무차별 살생을 저질렀다면 비판받아 마땅하다.

앞으로 정부는 미국의 협조를 얻어 노근리 사건의 진상을 백일하에 드러낼 판이다. 그러나 노근리 사건 한가지를 가지고 한국전쟁 전체로 확대할 수 없다.

북한군과 그 동조자들의 수많은 학살 만행은 잘 알려져 있다. 잘 알고 있다고 해서 면죄되는 것이 아니다.

노근리 사건이 새로 밝혀졌다 해서 미군의 한반도 군사활동 전체를 범죄행위로 규정할 수 없다. 조각그림 한 조각으로 짜맞추기 그림 전체를 알 수 없다. 전체그림을 알면 조각 하나하나의 위치를 정확하게 알 수 있다.

노근리 사건도 그렇게 보아야 한다. 발발 초기에서 정전에 이르기까지 전과정을 거쳐 피아간 밀리고 미는 전쟁 전체의 그림 속에 노근리 사건을 두고 판단해야 한다.

30여년간 군부의 권위주의 시대가 물러간 이후 해방 이후 최근사를 다시 쓰는 수정주의 입장이 유행을 타고 있다. YS정권의 역사 바로 세우기는 지금 더욱 기세를 올리고 있다.

지난날의 정사(正史)가 야사(野史)에 의해 크게 뜯어고쳐지고 있다. 수정되는 부분이 대부분 일정한 경향성을 가지고 있다는 데 주목하게 된다. 여울을 이루어 소리내며 흐르는 수많은 지류들이 결국 큰 줄기 주류에 합세해 조용히 흐르는 것이 제대로 된 도도한 역사의 흐름이다.

최근 수정주의 손길에 의해 큰 물줄기가 여러 지류로 갈려 요란한 소음을 내고 있어 역사의 흐름이 혼미해 보이게 만들어지지 않나 싶다.

튼튼한 자주 독립국가로서 강물이 막힘 없이 흐를 수 있을 만큼 역사의 샘이 깊다면, 한반도를 둘러싼 중.러.일 열강국의 이해관계를 견제할 미국의 존재가 불필요하다면, 한강 중심의 흐름을 대동강 중심으로 물길을 바꾸려는 세력이 없다면 우리는 수정주의 입장에 느긋할 수 있다.

우리는 끊임없는 과거사의 재조명을 통해 역사 인식이 중요해질 수 있음을 알고 있다. 오늘날 우리는 수정주의에 느긋할 수 없을 만큼 긴장을 요하는 국제정세 속에 국익을 추구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최근 동티모르 다국적군에 참여하는 군부대를 환송했다. 다행히도 위험이 적은 동부지역에 주둔하게 됐다고 하나 민병대와의 무력 충돌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 그때 발생하는 적측의 사상자가 반드시 무장군인에 국한되리란 보장이 없다.

지난날 월남파병군의 경우 민간인 살상이 전무하지 않았었다. 그것이 전쟁의 생리다. 비록 사실이 그러하더라도 한국전쟁 중 미군의 만행이 철저하게 밝혀지는 것이 바람직하다. 양민학살 보고를 듣고도 함구지시한 명령체계의 책임을 물을 것을 미국 정부에 촉구한다.

이 모든 것이 정치.경제.안보의 큰 그림 속에서 한.미간의 우호관계를 발전시키고, 21세기에 국제사회의 책임을 분담하는 국가, 자긍심 있고 국익을 앞세우는 국민으로 뻗어나갈 수 있기 위해서 필요하다.

김병주<서강대교수.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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