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티모르 파병안 투표 스케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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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여야가 격돌한 '동티모르 파병 동의안' 은 결국 여당의 국회 본회의 단독처리로 마무리됐다.

동티모르로 떠나게 될 군(軍)과, 이들을 보내는 국민에게도 개운치 않은 뒷맛을 남긴 모양새였다.

여야는 통일외교통상위에서부터 본회의에 이르기까지 대치와 격돌을 거듭하며 시종 평행선을 달렸다.

파병동의안은 결국 한.일어업협정 비준안 처리와 같은 수순인 '의장의 직권상정, 야당의 본회의 집단퇴장' 이라는 파행상을 재현했다.

◇ 본회의〓TV에 생중계된 본회의에서 여야는 각각 3인의 '대표선수' 를 내보내 한치 양보 없는 찬반토론을 펼쳤다.

홍순영(洪淳瑛)외교통상부장관의 제안설명 이후 등단한 한나라당 박관용(朴寬用)의원은 "현지교민.대사관의 의견수렴도 없이 대통령의 일방적 지시로 파병이 결정됐다" 며 "인도네시아의 배타적 민족감정을 자극할 필요가 어디 있느냐" 고 톤을 높였다.

반면 자민련 김현욱(金顯煜)의원은 "한국전 때의 국제적 은혜를 되갚는 게 국익을 위한 일" 이라고 '보은론(報恩論)' 을 주창.

한나라당 허대범(許大梵)의원의 반대토론이 시작되며 의석은 소란스러워졌다.

許의원은 "대통령이 인권을 내세워 노벨상 수상 목적으로 국군을 용병으로 쓴다면 용서할 수 없다" 고 주장했다.

여당석에서는 "말조심해" "저질발언 그만두라" 는 야유가 쏟아졌고, 야당측에서도 맞고함이 터졌다.

許의원이 "결국 전투가 벌어질 것이며 한명의 사상자만 나도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을 것" 이라고 공세를 계속하자 "거짓말 그만하라" 는 여당 의석의 목소리도 높아졌다.

국민회의 양성철(梁性喆)의원은 "싸움터에 전투를 하러 가는 게 아니라 치안.질서유지를 위한 파병" 이라며 "한반도 유사시 국제적 지원을 위해서라도 유엔에의 협조는 필수" 라고 했다.

마지막으로 등단한 국민회의 김상우(金翔宇)의원은 "노벨상은 동티모르 파병 정도로 탈 상이 아니다" 며 "노벨상 주최측에서도 웃을 '누워서 침 뱉기' 식 발언" 이라고 반박했다.

한나라당측은 이부영(李富榮)총무가 "앞으로 철군(撤軍)투쟁을 하겠다" 는 의사진행 발언을 하고 이를 신호로 집단퇴장을 시작했다.

이런 가운데 한나라당 이미경(李美卿)의원은 돌연 의사진행 발언을 신청, "지난 75년부터 동티모르의 인권상황에 줄곧 관심을 가져왔다" 며 '전투부대 파병' 을 호소했다.

◇ 총무회담 및 여야 움직임〓한때 야당의 단상점거 사태가 예상되기도 했으나 한나라당 이회창(李會昌)총재가 동티모르 파병문제와 관련, 여야 총재회담을 긴급 제의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총재회담은 여당의 거부로 무산됐지만 이후 여야 총무들이 긴급 회담을 갖고 협의 끝에 한나라당이 표결에만 불참키로 하는 선에서 반대의사를 표명키로 함에 따라 실력저지 등 충돌은 벌어지지 않았다.

한나라당은 오전까지만 해도 본회의장.국회의장실 등을 원천 봉쇄하기 위한 단상점거조.돌격조 등으로 저지조를 짜는 등 실력 저지하자는 강경론이 압도적이었다.

의총장에서 도시락을 먹는 등 결연한 분위기였다. 한나라당의 입장 선회는 "실력저지보다 반대 입장을 알리는 게 시급하다" 는 일부 의원들의 주장이 설득력을 얻게 되면서부터였다.

최훈.이정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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