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이런 일 할 대법원장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현 대법원장의 임기가 곧 끝나고 새 대법원장이 임명된다.

대법원장의 지위는 우리 헌정사에서 영욕 (榮辱) 이 교차하는 것이었다.

임기를 채우지 못한 대법원장이 여럿 있었고, 임기를 채운 대법원장도 업적에 대한 평가는 엇갈리고 있다.

과거의 대법원장이 과연 헌법상 부여된 권한과 의무를 다했는지에 대해서는 소극적인 평가가 지배적이다.

대법원장은 사법부의 장 (長) 으로서 국가권력의 일부를 행사하는 사법부를 대표하는 공무원이다.

대통령.국회의장과 나란히 하는 권력의 상징이며 대통령정부나 국회입법에 대해 견제하고 균형하는 사법기관의 장이다.

그러나 이제까지의 대법원장은 법원의 정책결정권을 행사하지 아니하고 통치의 종속변수처럼 기능해 왔다.

미국의 워렌법원이나 버거법원의 명칭만 보더라도 대법원장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다.

대법원장에 따라 법원 전체가 적극적.진취적으로도 될 수 있고 소극적.보수적으로도 될 수 있다는 점에서 대법원장의 행위는 민주정치의 방향을 결정하게 된다.

우리나라 법원이 미국과 달리 정책결정에 중요한 역할을 다하지 못하는 것은 대법원장의 소극적.보수적 자세 때문이다.

사법부는 가장 약한 부서로 자처하며 사법자제 (司法自制) 를 일삼아 온 경향이 있다.

대법원장이 판결로써만 말한다고 해 대량사면과 같은 사법 경시 현상에 대해 묵인하고 사법권독립을 외치는 소장판사들을 침묵시키기에 급급한 경우 법치주의는 기대할 수 없게 된다.

그동안 우리 법원은 세계굴지의 건물을 갖게 됐으며 양적 (量的) 으로 팽창했으나 국민의 법원에 대한 신뢰는 과연 하늘을 찌르고 있는지 의심스럽다.

그동안 국소적 (局所的) 인 사법개혁을 통해 시.군법원을 두고 행정법원과 특허법원을 두어 국민의 재판청구권을 확대한 것은 잘한 일이다.

그러나 권위주위적 법원 운영과 법조양성제도의 현상유지로 법조인구를 대폭 증원하지 못한 과오를 범한 것도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

일선법원에는 소송사건이 폭주해 재판이 지연되고 업무량 과중으로 법관의 이직 (離職) 이 늘어나고 있다.

법원합의부도 진정한 합의 없이 단독재판처럼 행해지고 있다는 비판도 있다.

이러한 법관 부족현상에 대해 이제까지의 대법원장 등은 법관의 수가 많으면 희소가치가 떨어진다고 생각해 소수정예주의를 고집해 왔는데, 새 대법원장은 법관 정원의 대폭증원을 통해 신속하고 공정한 재판을 보장해 주어야 한다.

과거 어떤 대법원장은 해외여행을 하지 않은 것을 자랑으로 생각하며 판사의 해외연수를 억제하고, 일본 서적과 판례만을 공부하게 한 적도 있었다.

일진월보 (日進月步) 하는 법학의 동향을 무시하고 과거에만 안주하는 대법원장이 돼서는 안된다.

세계화.국제화의 시대에 있어 사법에 있어서도 국제공조는 필수적이며 법률시장의 개방에 따라 외국변호사의 법정대리도 가능할 수 있으므로 대법원장은 미국이나 독일 등 선진국 사법제도도 알아야 하며 세계에 대해 개방적 자세를 취해야 한다.

법관의 해외연수를 대폭 증가시키며 외국법률문화 수입에도 개방적인 자세를 취하고, 일본 사법제도의 모방을 탈피하고 독일식 사법제도의 도입에도 적극적이어야 하겠다.

법원도 민주화돼야 한다.

법관의 임명 등에는 인사위원회의 동의가 있어야 한다.

보직.승진 등에 있어 인사의 독립이 보장되고 있는지 문제다.

그 동안 부정부패 법관에 대한 징계는 거의 없었으나, 재임명탈락 판사는 몇몇 있었다.

재임명제도를 판사의 표현의 자유를 제한하는 방향으로 운영해서는 안될 것이다.

새 대법원장은 일사불란한 판사체제를 확립하기보다 다양성 있는 판사 양성에 노력해야 하겠다.

새 대법원장은 안으로는 사법권의 독립을 주장하는 소장판사들의 의견을 최대한으로 반영할 것이며, 밖으로는 최고 권력기관의 하나로서의 지위에 걸맞은 정책결정권을 행사해 국민의 기대에 부응해야 할 것이다.

새 대법원장이 사법 사상 가장 명예로운 대법원장으로 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김철수 탐라대총장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