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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골프, 한국 골프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135호 16면

필자가 캘리포니아 골프스쿨(PGCC)에서 수학했던 건 2006년이었다. 방과 후에 틈틈이 필드에 나가 샷을 가다듬곤 했는데 파트너 한 명과 둘이서 라운드하는 경우가 많았다. 나 홀로 필드에 나가는 일도 다반사였다. 처음엔 ‘나 홀로 라운드’는 물론 ‘2인 플레이’도 낯설기 짝이 없었다. 국내에선 대부분 4명이 플레이를 했는데 낯선 이국땅에서 2인 플레이를 하다 보니 뭔가 빠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던 게다. 이게 뭐, 둘이서 내기를 하기도 좀 그렇고, 영 심심하기 짝이 없었다. 더구나 나 홀로 라운드를 하다 보면 겸연쩍기까지 했다.

정제원의 캘리포니아 골프 <80>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나 홀로 라운드나 2인 플레이가 더 편해짐을 느꼈다. 무엇보다도 4인 플레이보다 진행 속도가 빨랐다. 마음만 먹으면 3시간 안에 18홀을 마칠 수도 있었다. 나 홀로 라운드를 하다 보면 페어웨이 주변의 나무에 한번 더 눈길이 가고, 먼 산의 경치도 눈에 쏙쏙 들어왔다. 날이 어둑어둑해질 무렵 붉은 노을을 바라보며 홀로 필드를 거닐다 보면 뜻밖의 동반자가 생겨났다. 코끝을 간질이는 풀 향기, 먼 하늘에 떠 있는 구름, 해질녘의 타는 듯한 노을이 나의 파트너인 셈이었다.
이듬해 한국에 돌아와 필드에 나섰다. 대부분의 경우엔 동반자가 3명. 2인 플레이나 나 홀로 라운드는 상상할 수도 없고, 4인 플레이가 주류를 이뤘다. 그러면서 점점 내기 골프에 익숙해졌다.

“뭐, 심심한데 그냥 라운드를 할 순 없잖아. 5만원씩 내서 스킨스 게임이나 하지.”
누군가 1번 홀 티잉 그라운드에 올라서기 전에 꼭 이런 말을 꺼낸다. 내기 골프 방식도 각양각색이었고, 그 방식이 진화와 변천을 거듭했다. 스킨스 게임만으론 심심해서인지 ‘조폭 스킨스(버디를 하면 스킨을 차지하고, 더블보기 이상을 하면 이미 획득한 스킨을 토해내는 방식)’가 등장했다. 1등과 4등, 2등과 3등이 편을 먹은 뒤 승자를 가리는 라스베이거스가 유행하더니 최근엔 4개의 티펙이나 화투장을 이용한 ‘신라스베이거스’가 대세다. 이것만으론 모자라 1개의 티펙을 조커로 끼워넣는 방식까지 나왔다. 조커를 뽑으면 ‘버디’건, ‘트리플 보기’건 내기에선 무조건 ‘보기’로 인정하는 방식이란다.

‘3, 6, 9’ 게임도 있다. 한 사람의 독주를 막기 위해 스킨 3개를 획득하면 0.5타의 핸디캡을 주고, 6개를 획득하면 1타, 9개를 따내면 2타의 핸디캡을 적용하는 방식이다.

세태를 반영한 골프 관련 유행어도 많다. KBS는 ‘깃대 뽑고 비켜 ××놈아’의 준말이고, MBC는 ‘마크하고 비켜…’의 축약어란다. SBS는 ‘싸우지 말고 비켜…’, TBS는 ‘티 그만 찾고 비켜…’, CBS는 ‘캐디하고 그만 노닥거리고 비켜…’의 준말이란 걸 필드에서 배웠다(의사 전달을 위해 비속어가 들어간 단어를 사용한 걸 양해해 주시길). 최근엔 ‘오바마’까지 등장했다. ‘오케이 바라지 말고 비켜’란 뜻이란다.

미국 골프가 ‘자연과의 소통’이라면, 한국 골프는 철저한 ‘재미’를 추구한다. 내기 종류도 다양하고, 세태를 반영한 유행어는 하루가 다르게 쏟아져 나온다. 그런데도 가끔은 미국 골프가 그립다. 라운드를 하면서 붉은 노을을 바라볼 줄 아는 여유를 잃은 지 오래됐기 때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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