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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시평] 난지도에 골프장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나는 골프를 치지 않기 때문에 골프에 대해서는 시비하지 않으려 마음먹고 있다.

지난날 '골프 망국론' 을 웅변하던 친구들이 그 뒤에 골프를 배우고 나면 "요것이 요처럼 좋은 줄 몰랐다" 고 슬그머니 골프예찬론자로 '변절' 한 사례들을 봐왔기 때문이다.

국가경제적.사회적 관점에서 골프망국론을 펼친 논리에도 내 머리는 설득당했다.

건강관리적.심미적 관점에서 골프예찬론을 펴는 수사 (修辭)에도 내 마음은 끌린다.

그러나 그 어느 쪽에도 내가 동조하지 않는 까닭은 그런 논리나 수사에는 다 '나' 만 있고 '남' 의 입장을 생각해주는 페어 (공정함)가 없어보이기 때문이다.

자기가 골프를 안 칠때도 골프예찬론을 펴고 자기가 골프를 즐길 때도 골프망국론을 편다면 나는 그 소견에 전적으로 공감했을 것이다.

요즘에는 '골프 대중화론' 을 펴는 사람도 있는 모양이지만 그런 '급진 민주주의' 에는 숨이 가빠 나는 따라갈 수가 없다.

아무리 좋은 운동이라 하더라도 골프는 한국의 가난한 '대중' 에겐 너무 많은 돈과 시간을, 그리고 한국의 손바닥만한 국토에는 너무 많은 공간을 요구하는 아주 값비싼 운동이다.

보도에 의하면 서울시가 난지도에 골프장을 만들 계획인 모양이다.

아무래도 잘 하는 일 같지가 않다.

땅값이 금값인 협소한 천만도시 서울. 그 서울의 서쪽에 수십년 동안 버린 쓰레기를 쌓아 만든 드넓은 땅을 소중하게 이용할 용도가 얼마든지 있을 법 한데 하필이면 골프장이란 말인가.

유럽에서는 도시가 확장하면서 외곽으로 이전한 농산물도매시장터에 현대미술센터를 짓고,가축도살장이었던 자리엔 어린이를 위한 '과학도시' 를 꾸며주고, 화력발전소 공터에는 중앙박물관의 신관을 건설함으로써 '새 천년맞이' 들을 하고 있다.

그런데도 새천년의 첫 월드컵대회를 치르는 상암경기장 옆에 인구 천만도시에 걸맞은 단 하나의 대단위 녹지공간도 마련하지 못하고 있는 서울시가 골프장부터 지어놓고 세계의 손님맞이를 하겠다는 것인가?

국토의 평지면적이 한국의 열배.스무배도 넘고, 인구는 우리보다 훨씬 적은 나라들도 골프장 수는 우리의 10분의1, 20분의1도 안되는 경우가 유럽에는 대부분이다.

그러나 그러한 유럽 제국의 수도에는 외곽이 아니라 도심에 반드시 노약자나 차 없는 사람들이 쉽게 찾아와 즐길 수 있는 백만평규모의 대단지 녹지공원이 있다.

파리의 부아드블로뉴나 베를린의 티어가르텐, 런던의 하이드파크나 리전트파크가 그런 보기이다.

예전에는 서울의 외곽을 흐르던 한강이 강남 개발로 이제는 도심을 흐르는 강이 됐다.

그것은 절호의 기회였다.

나는 한강변에 백만평규모의 시민공원을 마련할 것을 60년대말부터 기회있을 때마다 지면을 통해 제안해보았다.

결과는 소 귀에 경 읽는 꼴이 되고 말았다.

한강변의 조망이 좋은 땅은 아파트업자에게 팔려나가고, 강의 양안에는 자동차전용도로를 닦아 차없는 시민은 한강에 얼씬도 못하게 만들어버렸다.

그나마 한강둔치에 잔디밭이 생기나 했더니 거기에까지 다시 차들이 몰려와 녹지공간은 날이 갈수록 빈약해지고 있다.

참으로 비인도 (人道) 적 차도 (車道) 제일주의의 행정이랄밖에…. 난지도가 지금은 서울의 외곽이지만 상암경기장이 준공되고 3년후에 2002년 월드컵이 개최되고 그 주변에 아파트 군락 (群落) 이 들어서게 되면 그곳은 곧 또 하나의 도심권을 형성하게 될 것이다.

그러한 수도의 도심에 골프장을?

해방이전부터도 우리나라 산들은 나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벌거숭이 산이었다 (마치 지금의 북한땅의 산들처럼) .그러한 한국이 이제는 세계의 4대 조림 성공국의 하나로, 그것도 20세기에 들어와 조림에 성공한 제3세계의 유일한 나라로 국제식량농업기구 (FAO) 의 평가를 받고 있다.

6.25이후 30년을 하루같이 해마다 4월이 오면 온 국민이 말없이 나무를 심어온 결과가 빚은 한국현대사의 또 하나의 '기적' 이다.

그러한 적공 (積功) 의 푸른 산들이 80년대 후반부터 골프장 허가의 남발로 다시 볼썽사납게 파헤쳐지고 벗겨지고 있다.

새 천년을 맞기 위해 숲이 울창한 나라들도 다시 '밀레니엄 숲' 을 만들자고 하는 판이다.

난지도에 수목이 멋대로 무성하게 자라고 잔디가 질펀하게 펼쳐지는 한국 최초의 광활한 '잉글리시 가든' 을 조성하면 얼마나 좋을까. 마지막 절호의 기회다.

모처럼 최고의 두뇌들로 진용을 짠 서울시 당국의 재고를 바란다.

최정호 울산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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