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오프 더 레코드 (16)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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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16) 북청 꼬마주먹

나는 파인 (巴人) 김동환 (金東煥) 의 시를 지금도 애송 (愛誦) 한다.

특히 '북청 (北靑) 물장수' 를 가장 좋아한다.

"새벽마다 고요히 꿈길을 밟고 와서/ 머리맡에 찬물을 쏴 - 퍼붓고는/그만 가슴을 디디면서 멀리 사라지는/북청 물장수. " 너무도 근면하고 성실해 차라리 애처롭기까지 한 '북청 물장수' 는 분명 내 고향, 내 아버지의 모습 그대로다.

나는 1926년 9월8일 함경남도 북청군 신창리 (新昌里)에서 2남1녀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李苾顯.74년 작고) 는 시인 김동환이 다닌 서울 중동중학에서 2학년까지 전교 1등을 할 정도로 수재였다.

그러다 집안이 풍비박산 (風飛雹散) 나는 바람에 그만 중퇴하고 말았다.

할아버지가 독립운동을 지원하다 일본 경찰에 적발돼 치른 대가였다.

아버지는 북청으로 내려와 집안을 다시 일으켰지만 잃어버린 학창시절에 대한 미련을 떨칠 수 없었던 것 같았다.

그래서일까. 자식들에 대한 어머니 (崔魯愛.95.한영학원 명예이사장) 의 교육열은 정말 대단했다.

그런데도 나는 이미 신창소학교 시절부터 소문난 사고뭉치였다.

어느 하루도 어머니가 학교에 소환당하지 않은 날이 없을 정도였다.

일본 학생들만 마주쳤다 하면 주먹을 휘두르는 바람에 내겐 어느샌가 '북청 꼬마주먹' 이라는 별명이 붙고 말았다. 그렇지만 남동생 (陳元) 과 여동생 (東星) 은 워낙 공부를 잘해 당시 초등학교로는 명문축에 들었던 서울 재동소학교로 유학까지 갔다.

내가 졸업반이 되자 문제는 더 심각해졌다.

도대체 공부를 했어야 중학교 입학시험이라도 볼 게 아닌가.

참다 못한 어머니가 공부 좀 열심히 하라며 내게 애원하다시피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렇다고 내가 어머니의 깊은 뜻을 모를 리야 있었겠는가.

어머니는 "장남인 네가 그래서야 동생들한테 체면이 서겠느냐" 며 나를 다그치곤 했었다.

마침내 소학교 졸업을 앞두고 아버지가 나를 불렀다.

좀처럼 야단치는 법이 없는 아버지였기에 나는 '맞아죽을 각오로' 방에 들어갔다.

표정은 심각했지만 목소리는 의외로 차분했다.

"공부하기 힘들지? 애비가 알아보니 개성에 있는 송도중학교 (사립)가 괜찮다는구나. 가서 한번 시험을 보거라. " 아버지의 말씀을 거역할 용기가 없어 '그러겠다' 고 대답하고 말았다.

드디어 입학시험날. 시험지를 받았는데 이름 석자를 쓰고 나니 더 이상 쓸 말이 없었다.

중간에 나올 수도 없어 답안지에 내내 그림만 그려댔다.

시험을 마친 나는 '합격은 일찌감치 물건너 갔다' 고 마음을 굳혔다.

그런데 2주일 뒤. 송도중학교에서 한 통의 편지가 날아들었다.

합격통지서였다.

정말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나중에 알게 됐지만 아버지는 평소 잘 알고 지내던 이 학교 김준옥 (金俊玉) 교장선생님과 내 문제를 상의했다.

당시 金교장은 강당 신축경비가 모자라 고민중이었는데 이를 전해 들은 아버지가 지원을 약속해 준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나는 결국 '뒷문 입학생' 이 됐다.

金교장은 당시로는 드물게 미국유학을 다녀온 인텔리로 철저한 민족주의자였다.

아버지는 자식의 장래를 걱정하면서도 민족의 미래에 투자한다는 생각으로 거금을 쾌척한 것 같았다.

나는 개성에서 하숙을 하면서 중학교를 다녔다.

처음에는 '기부금 입학생' 이라는 꼬리표 때문에 공부를 해 볼까 생각했지만 작심삼일 (作心三日) 이었다.

일본 학생들이 다니던 개성중학생을 만나기만 하면 두들겨 팼고 그럴 때마다 金교장이 앞장서 막아 주곤 했다.

일본 경찰이 나서기 전에 수습하려다 보니 교장선생님은 형식적으로라도 내게 징계, 정학, 무기정학 등을 요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다 보니 나는 송도중 개교이래 최다 처벌기록 보유자가 되고 말았다.

글=이동원 전외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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