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글라스를 쓴 한성종두사 소장 박진성(가운데). 뒤쪽에서는 직원들이 송아지에서 혈청을 뽑아 내고 있다(고종의 독일인 의사 분쉬, 학고재).
그러나 우두의 효과가 점차 입증되면서 자진해 접종하는 사람이 조금씩 늘어났고, 종두법을 배우려는 사람도 많아졌다. ‘종두규칙’ 공포 한 달 뒤 ‘종두의 양성소 규정’이 만들어져 많은 종두의를 배출했다. 정부의 구상대로 모든 영유아에게 접종하지는 못했지만, 두창은 이후 많이 줄어들었다. 1908년 대한의원 교관 유병필이 황성신문에 게재한 우두기념취지서는 “지석영이 우두를 소개한 지 30년 사이에 우두가 전국에 널리 퍼져 대개 30세 이하 사람은 모두 두창을 면하여 인구가 전보다 많아졌을 뿐더러 길가에 얼굴 얽은 자가 없다”고 기록하였다.
그렇지만 종두로 모든 전염병을 막을 수는 없었다. 콜레라·장티푸스·말라리아·뇌염 등이 수시로 유행하여 수많은 목숨을 앗아갔다. 1910년에는 콜레라 사망자만 1만3570명이었고, 55년에는 뇌염 사망자만 761명이었으며, 69년에도 콜레라 사망자가 125명이었다. 전염병 말고도 죽음으로 이끄는 요소들은 너무 많았으니 삶과 죽음은 무척 가까웠다. 일상에서 죽음을 멀리 밀어낼 수 있게 된 것은 최근 한 세대 동안의 생활환경 개선과 의학 발달 덕이다. 사람들은 비로소 안정적으로 미래를 설계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삶과 죽음 사이의 거리가 멀어진 만큼 죽음에 대한 공포는 오히려 커졌다. 신종 플루가 예정된 여러 행사를 망치고 사람들의 인사 풍속까지 바꾸어 놓았다. 치사율 0.1% 미만의 전염병을 이토록 겁내게 된 것도 어찌 보면 그만큼 세상이 안전해진 때문일 것이다.
전우용 서울대병원 병원역사문화센터 연구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