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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하기 좋은나라 멀었다] 4. 民-民규제 위험수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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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그것 참…, 협회가 하는 일이란 게 죄다 이 모양이니…. " L전자 경남공장의 방화관리자 權모 (30) 씨는 지난 5월을 기억하기조차 싫다.

1천만원의 경비를 들여 외부에 위탁, 소방관리사 5~7명으로부터 한달여 동안 집중적인 자체 화재안전점검을 한데 이어 인근 소방서의 점검도 받았다.

그로부터 며칠 뒤 한국화재보험협회 직원 3명이 안전점검을 한다며 들이닥쳤다.

그들은 30만평에 달하는 넓은 공장을 6시간 만에 점검하는 '놀라운 기술' 을 발휘했다.

문제는 협회의 안전점검이 소방서와 중복되는 데다 실효도 없다는 점. 게다가 급조된 점검보고서나마 아예 보내주지도 않는다.

협회는 무료로 안전점검해준다고 생색내지만 결국 필요없는 안전점검을 해주고 매달 11개 화재보험사로부터 기업들이 낸 보험료의 일부를 방재활동비 명목으로 거둬들인다.

이달 징수금액만도 5억8천여만원. 협회 직원들은 점검이 끝나갈 무렵 한술 더 떴다.

"개인 자격으로 협회의 위험관리정보센터에 가입하면 좋은 자료를 받을 수 있다" 며 가입을 은근히 권유했다.

權씨는 썩 내키지 않았지만 '혹 불이익을 당할지 모른다' 는 생각에 울며 겨자 먹기로 응할 수밖에 없었다.

연회비는 15만원. 자영업도 사정은 마찬가지. 인천에서 숙박업을 하는 朴모 (46.인천시 남구 용현동) 씨는 숙박업협회만 생각하면 분통이 터진다.

매달 1만6천원의 회비를 꼬박꼬박 내지만 협회로부터 받는 것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1년에 한차례 1만원을 내고 받는 4시간짜리 교육도 교양강좌와 편법교육으로 채워진다.

그뿐만이 아니다.

총회에 가봐도 예.결산 보고가 없어 회비를 거둬 어디에 쓰는지 알 도리가 없다.

올들어 朴씨가 협회로부터 받은 것이라고는 '미성년자 연령이 20세에서 19세로 하향조정됐으니 영업에 참고하라' 는 공문 한장이 전부다.

이래저래 고민하던 朴씨는 가입 의무도 없는 협회 탈퇴를 여러차례 생각해봤지만 업자들 사이에 '비회원은 경찰이나 구청의 까다로운 단속 등 보이지 않는 불이익을 본다' 는 인식이 퍼져 있어 이마저 엄두를 못낸다.

각종 사업자단체의 폐해가 심각하다.

민간 사업자단체와 협회가 지도.단속 등 정부업무를 위임받아 회원 위에 군림하면서 막강한 권한을 휘둘러 회원들은 물론 일반 국민의 이익도 침해하는 이른바 '민 - 민 (民 - 民) 규제' 가 위험수위에 달한 것이다.

공정거래위원회에 따르면 98년말 현재 전국의 사업자단체는 모두 6천3백16개.

이 가운데 규제업무를 수행하는 사업자단체 (규제개혁위원회 집계) 는 보건복지부 43개, 산업자원부 40개, 건설교통부 32개 등 모두 1백55개.

이들은 ▶보수교육.검사 등 경쟁도입이 가능한 위탁사무 독점과 가격담합 등의 불공정 행위 ▶회비를 과다 징수하는 등의 공통적인 문제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그간 규제개혁은 정부가 일반 기업이나 일반 국민에 가하는 '관 - 민 (官 - 民) 규제' 에 초점이 맞춰진 나머지 '민 - 민 규제' 는 사각지대로 남아 있다는 방증이다.

최근 한국전분당협회와 식품업체들 사이에는 추천권을 빌미로 한 시장 진입 제한 논란이 일고 있다.

관건은 옥수수를 수입할 때 협회가 회원인 8개 회사에 대해서만 추천을 해줘 낮은 관세 (양허관세 3%) 를 물도록 해주는 것. 추천을 받지 못할 경우 무려 3백65%의 관세를 부담케 돼 수입은 엄두도 낼 수 없게 된다는 것이 식품업체들의 지적이다.

협회는 "수입 옥수수는 전분당용으로만 쓰여야 하고, 이는 양곡관리법에 따른 제조면허를 가진 회사만 가능하므로 회원으로 가입한 제조사들만 추천하고 있다" 고 설명한다.

그러나 식품업체들의 생각은 다르다.

"제조업 면허가 없고 협회 회원사가 아니면 고율의 관세를 감내하라는 것은 추천권을 이용한 교묘한 담합행위" 라는 것이다.

기획취재팀 = 박의준.하지윤.왕희수.양선희. 박장희. 나현철.고정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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