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의 눈] 실명제 변주곡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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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모처럼 롯데월드로 가족나들이를 갔다.

인기 있는 놀이기구를 하나 타려면 1시간은 꼬박 기다리기 수차례. 2분 안팎의 '스릴' 을 맛보려고 이리 꼬불, 저리 꼬불 하다 보니 시장기가 밀려왔다.

그런데 이게 웬일? 요기 삼아 들른 스낵코너에는 고작 두세명뿐인 종업원들이 저마다 명찰을 달고 있었다.

이제 놀이공원의 미니 스낵코너까지 서비스 실명제를 하는 세상이다.

금융실명제 및 비밀보장에 관한 대통령 긴급명령으로 93년 8월 12일 금융거래실명제가 도입된지 만 6년. 그 사이 우리 사회는 크게 달라졌다.

식품의 생산자를 밝히는 것은 물론 요즘에는 시내버스에도 운전기사의 얼굴사진이 실린 명패를 내리는 문 위에 달아둔다.

택시의 불친절이나 불법행위를 고발하라는 교통불편 신고엽서를 흡사 '보물 찾기' 라도 하는 양 운전기사석 근처 한 귀퉁이에 놓아두었던 것과 비교하면 엄청나게 달라진 셈이다.

요리사의 이름을 내건 음식점도 많아졌다.

'김정문 칼국수' 도 있고 '강영순 김밥' 도 있다.

엇비슷한 가게 이름으로 서로 '원조' 시비를 벌이던 것을 생각하면 격세지감마저 든다.

뿐이랴. 남의 돈을 굴려주는 펀드 매니저에도 실명제 바람이 불어 다른 동료보다 '이름값' 을 톡톡히 올리는 이들까지 생겨나고 있다.

대전에서는 지난해부터 신설 각급학교에 지급되는 높낮이 조절용 책.걸상에 사용 학생의 이름을 표시해 졸업 때까지 스스로 관리하게 하는가 하면 충북 영동에서는 유원지 이용객들에게 자신이 놀던 자리를 깨끗이 관리하는 책임을 지우는 '놀던 자리 실명제' 를 시행 중이다.

군포에서는 가로수 관리실명제를 도입, 나무마다 인근 주민을 지정해 돌보게끔 책임지우고 있다.

공급자 책임 일변도에서 수요자에게도 책임을 묻는 2단계 실명제인 셈이다.

나라 운영을 짊어지고 있는 입법부.행정부.사법부도 예외는 아니다.

국회에서는 안건에 대한 찬반 토론이 있을 때 기명투표를 실시하자는 법안 실명제 제안도 있었고, 서울지법 의정부지원에서는 올해부터 재판담당 판사나 담당계장의 이름을 명시 - 부착하는 재판부 공개 실명제를 하고 있다.

행정부는 '국민의 정부' 가 들어선 이후만도 정책실명제 (98년 7월).병역실명제 (99년 5월)에서 정수장 관리 실명제 (99년 5월) , 의료보험 진료비심사 실명제 (99년 3월)에 이르기까지 크고 작은 실명제를 잇따라 채택해 일일이 손을 꼽기도 부족하다.

사회 구석구석이 '익명' 에서 '실명' 으로 바뀌고 있는 것이다.

실명제의 본질은 '책임' 과 '투명' 이라고들 한다.

내가 잘못을 범해도 아무도 그것을 알지 못하며, 따라서 나는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된다는 '익명의 행복' (?) 과는 작별인 셈이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이런 '실명 사회' 에서도 여전히 익명의 행복을 누리는 이들이 있다는 것은. 60여명의 인명피해에 강원도 피해액만 5백3억원이 넘는다는 이번 수해에도 나는 아직 어떤이가 문책당했다거나 공을 세웠다는 말을 듣지 못했다.

지난 2월 8일자 신문은 김정길 당시 행자부장관이 '수해복구비 선 (先) 집행 후 (後) 청산제' 를 내세우며 지난해의 폭우 피해를 되풀이하지 않도록 3~5월을 여름철 재해 사전대비기간으로 설정, 7천여곳의 취약시설물을 데이터베이스화해 체계적으로 관리하고 지역주민.관계공무원.시공자를 복수책임관리자로 하는 '재해 실명제' 를 발표했다고 전한다.

나아가 피해발생시 책임소재를 규명하는 '개인 및 기관 책임제' 와 우수단체 및 개인에 대한 '인센티브제' 를 병행추진하고 재해위험지구.대규모 공사장 등에 일제점검을 실시, 장마철까지 완전 정비하기로 했다 한다.

과연 여기에 어떤 이의 이름이 쓰여 있을까. 그리고 참담한 수재 이후 그들은 어떻게 됐을까. 혹시 지금 우리는 화려한 '실명제 변주곡' 에 귀 멀어 '무늬만 실명사회' 를 참 실명사회로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참다운 실명사회라면 결과에 대해 엄격히 공과를 따져 책임을 묻는 평가시스템이 있어야 하며 또한 그것이 건강하게 작동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기 위해 그 평가 시스템의 1차 구축은 실명제를 채택하고 있는 주체가, 2차적 평가 시스템은 시민 개개인이 맡아야만 한다고 여긴다.

화장실 청소담당 실명제까지 난무하고 있는 이즈음 과연 후속평가를 제대로 하고 있는 곳은 얼마나 될까. 또 우리들은?

식품이건, 서비스건, 입법행위건, 사법행위건, 행정행위건 간에 '눈가리고 아웅' 하는 실명제라면 차라리 없는 게 낫다.

그래야 조금이나마 '정직한' 사회다.

홍은희 생활과학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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