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중앙시평

말은 느려두 눈치는 잽싸유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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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충청도서 올라온 지 사흘밖에 안 됐시유 ~/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나예유~/(중략)/영화구경 간다더니 어디루 가남유~ / 시골에서 왔다구 깔보지 말어유~ / 말은 느려두 눈치는 잽싸유~’

수 톰슨의 히트곡 ‘새드 무비’를 패러디해 1970년대를 풍미하던 주점가 유행가다. 술자리에서만 떠돌다 사라진 이 노래가 예전 노랫말 거의 그대로 최근 부활했다. 김미진의 ‘시골색시’. 젓가락 장단에 맞춰 이 노래를 부를 때만 해도 강원도 출신이나 충청도 출신이나 깡촌놈이긴 마찬가지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30여 년이 훌쩍 지난 요즘 강원과 충청은 다 같은 깡촌이 아님을 절감하고 있다. 살림의 수준은 물론이요, 개각 인사나 지역개발 정책에 대한 영향력 면에서 ‘충청도의 힘’은 ‘강원도의 힘’을 납작하게 만든다.

특히 현 정부의 충청 사랑은 유난히 각별하다. 검찰총장·국세청장 등 힘깨나 쓴다는 자리에 충청 출신을 모시려고 애쓰더니 총리는 아예 충청도 사람 중에서만 물색했다고 한다. 여기다 이명박 대통령은 호남과 함께 충청도를 각별히 배려하겠다는 약속까지 했다. 참 부럽다.

반면에 한승수 총리와 이상희 국방장관이 교체된 뒤 MB정부 2기 내각 명단에선 강원 출신이 사라졌다. 강원도 사람들은 허탈하지만 애써 자위한다. “강원도에서 총리 한번 해먹었으면 된 거지 뭐.” “경춘 고속도로까지 뚫려 서울이 지척이니 이제 강원도는 수도권이야.”

지난번 첨단의료복합단지 결정 때도 강원도민은 무척 섭섭했다. 경합지역 중 대구가 최고 점수를 받았고, 그 다음으로 원주와 오송이 동점인 것으로 발표됐으나 원주만 탈락했다. 강원도민들은 무슨 정치적 고려가 있지 않았겠느냐는 의심을 지우지 못한다. 대구는 정권의 연고지요, 오송은 이 정권이 특별하게 배려하는 지역이 아니냐고.

살림살이를 보면 충청과 강원은 거의 다른 나라다. 특히 충남 지역이 그렇다. 매년 전국 평균의 두 배가 넘는 두 자릿수 성장률을 기록하고 있는 충남의 2007년 1인당 생산액은 2848만원이다. 1767만원인 강원도의 두 배에 가깝다. 수도권을 제외한 지방의 인구가 해마다 줄고 있지만 대전과 충남· 충북은 모두 인구가 늘었다. 지난 10년 새 충청 인구는 30만 명이 늘었고, 강원도는 3만 명이 줄었다. 충청이 ‘먹을 게’ 있고 ‘살 만한’ 지역이란 얘기다.

한때 충청도 사람들은 영·호남의 대결에 묻혀 상대적으로 홀대 받는다고 투덜거렸다. 그러나 지금 누가 감히 충청도를 ‘핫바지’로 보고 ‘푸대접’하겠는가. 정치권에서 충청은 귀족 손이 된 지 오래다. 지난 14대부터 17대 대선까지 충청권에서 1위를 차지한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됐다. 충청 유권자는 전체의 10%에 불과하지만 영호남으로 갈라진 지역 대결 구도에서 충청 표심은 당락을 좌우하는 중요한 지렛대다. 3당 합당, DJP연합, 수도 이전 모두 오로지 충청표를 얻어보겠다는 구애(求愛)작전 아니던가.

노무현 대통령이 수도 이전 문제로 “재미를 좀 봤다”고 했지만 정작 절묘한 지정학적 구도로 재미를 보고 있는 건 충청도요, 충청도 사람들이다. 충청도 출신 대통령이 없다는 게 좀 아쉬울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대통령 선택권을 거머쥐고 있다는 자부심과 정치권의 배려는 결코 작지 않은 자산이다.

세종시를 놓고 충청도 사람들이 화가 잔뜩 나있다고들 한다. 정말 그런가? 그제 문화일보의 여론조사에서 충청인들은 원안 추진(37.0%)보다 경제특구·과학비즈니스벨트 등 다른 기능을 추가하자(52.8%)는 쪽이 많았다. ‘말은 느려두 눈치는 잽싸유~’가 틀림없다. 충청인들은 이미 눈치 채고 있는 것이다. 세종시는 이미 터닦이가 끝나 백지화는 어렵다는 사실을. 정부 부처가 오지 않아도 예산 22조원은 그대로 집행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행정도시가 유령도시화할 게 뻔하다면 대기업과 대학, 과학단지를 유치해 자족도시를 앞당기는 게 훨씬 실속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모르거나 모른 체하는 쪽은 내년 지자체 선거 등에서 재미를 보려는 정치권뿐이다. 지역균형발전론을 앞세워 원안 추진을 고집하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강원도 사람들의 가슴엔 찬바람이 지나간다.

한가위 보름달이 둥실 떠올랐다. 달님! 세종시 문제로 여전히 마음 상한 충청도 양반들이 있다면 그들에게, 그리고 매양 뒷전으로 밀리지만 끽소리도 못하는 강원도 산비탈에도, 영남에도, 호남에도, 고향을 못 간 수도권 사람들에게도 달빛을 고루 비춰주소서.

허남진 논설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