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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젤 권총과 롤스로이스 팬텀H에 실은 사나이의 로망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133호 04면

스릴러계의 롤스로이스, 유로 스릴러의 금자탑, 사나이들의 할리퀸….
알 만한 사람은 척 알아듣는다. 영국 작가 개빈 라이얼(1932~2003)의 『미드나이트 플러스 원』(1965)을 말한다. 스토리는 단순하다. 두 건맨, 나(루이스 케인)와 하베이 로벨은 대부호 마간하르트를 사흘 안에 프랑스 해안에서 리히텐슈타인까지 육로로 데려다 주는 일을 맡는다. 도중에 마간하르트를 없애려는 킬러들이 습격해 온다. 제목은 마간하르트가 목적지에 도착해야 하는 시한인 24시1분을 뜻한다.

남윤호 기자의 추리소설을 쏘다 - 개빈 라이얼의 『미드나이트 플러스 원』

이 책엔 잔재주나 트릭이 없다. 고수가 한번 휙 그은 획처럼 여분의 덧칠이 없다는 얘기다. 담백한 필체가 매우 남성적이다.또 남성의 기호에 맞는 소도구가 재미를 더한다. 권총과 자동차가 그렇다. 어릴 때 총싸움, 자동차 놀이에 미쳐 보지 않은 사내 녀석이 어디 있나. 사실 남자들, 나이 먹어도 한 꺼풀 벗기면 모두 어린애 아닌가. 두 건맨이 자신의 권총을 내보이며 서로를 탐색하는 장면을 보자. 총은 곧 사나이의 인격이라도 되는 듯한 표정들이다.

케인의 권총은 1932년형 모젤. 무게 1.3㎏, 길이 30㎝의 대물(大物)이다. 로벨이 어이없다는 듯 한방 날린다. “트레일러에 싣고 끌고 갈 참이오? 아니면 화물열차로 먼저 보낼 생각이오?” 크고 묵직한 구식 권총이지만, 그 독특한 스타일에서 케인은 일종의 미학을 찾는다.

총에 대한 개똥철학도 그럴듯하다. “권총만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소. 총은 말의 뒷받침 없이는 아무것도 아니오. 너희는 정의로운 일을 하고 있다는 말 말이오.” 이거 웃긴다고 비웃지 말자, 그 분위기가 진지해 읽다 보면 그냥 빠져든다.
이들이 탄 차도 명물이다. 초반엔 시트로앵DS, 후반엔 롤스로이스 팬텀H. 차의 성능·외관·승차감이 손에 잡힐 듯 묘사돼 있어, 자동차 매니어라면 침이라도 흘릴 법하다. 차에 대한 감정이입도 보통이 아니다. 총격을 받은 뒤 시트로앵의 유압펌프에서 기름이 새자 “출혈하고 있다”고 한다. 롤스로이스엔 “오리엔트 특급열차와 전함 사이에서 태어난 튀기에 네 바퀴를 달았다”고 비유한다.

주인공의 매력은 또 어떤가. 로벨은 왼손만으로 생활한다. 담배를 꺼내 물 때도, 성냥을 그을 때도 모두 왼손이다. 왼손잡이라서가 아니다. 오른손은 언제든지 총을 빼들 수 있게 비워 두는 것이다. 그는 또한 늘 술의 유혹과 싸우는 알코올 중독자다. 냉철한 프로 의식과 나약한 인간적 허점, 이게 로벨의 캐릭터에 풍부한 입체감을 더해 준다.

그리고 케인은 임무와 정의감 사이에서 방황한다. 전쟁 중 레지스탕스에서 활동했던 경력이 대의명분을 요구하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합리화를 한다. 나는 마간하르트가 살해되는 것을 막기 위해 고용됐고 적들은 그를 죽이기 위해 고용됐으니, 내가 정의롭다며.

킬러들도 한몫한다. 악역인데도 절도가 있다. 마지막 총격전에서 화염에 휩싸인 킬러, 죽어가면서도 임무를 수행하려는 그의 행동은 임협(任俠)이란 말 외에 달리 표현하기 어렵다. 이 대목을 반복해 읽느라 진도를 못 나가는 남성, 한둘이 아니다.
그리고 작은 반전. 유럽의 최고 총잡이들을 해치운 뒤 케인은 로벨의 손가락을 부러뜨린다. 그러면서 하는 말. “명을 늘려준 걸세.” 느슨한 자세로 총을 잡다간 목숨 부지하기 어려우니 한동안 운기조식하고 있으란 뜻이다. 터프가이의 우정 표현, 참 진하게도 한다.


추리소설에 재미 붙인 지 꽤 됐다. 매니어는 아니다. 초보자들에게 그 맛을 보이려는 초보자다. 중앙일보 금융증권데스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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