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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아니면 '아니오'해야지 (20)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4면

(20) 국사봉 전투

1949년 3월 나는 대령 진급과 동시에 12연대장으로 임명됐다, 12연대는 1사단 (사단장 金錫元) 소속이었는데 11연대 (崔慶祿) , 13연대 (金益烈) 와 함께 서부전선을 지키고 있었다.

연대본부는 인천에 있었고 경기도 경찰 기동대 3개중대 (4백명) 과 함께 옹진반도 (甕津半島) 를 맡고 있었다.

'카이젤수염' 으로 잘 알려진 사단장 김석원장군은 일본육사 출신으로 일찌기 중국 태원 (太原) 작전에서 크게 용명을 떨쳤던 분이다.

연대에 부임해 부대사정을 파악하려고 옹진 일대 전선을 순시하고 있는데 일선에서 긴급보고가 올라왔다.

수를 알 수 없는 북한군이 38선을 넘어와 아군의 국사봉 (國師峯) 고지를 점령했다는 것이었다.

나는 즉각 참모회의를 소집했다.

국사봉은 꼭 탈환해야만 하는 요충지역이었다.

당시 우리 연대는 두락산 - 국사봉 - 충무고지 - 은파산으로 이어지는 전선을 방어하고 있었는데 해발 527m의 국사봉은 가장 중요한 감제고지 (監制高地) 였다.

그러니 국사봉을 잃으면 옹진반도 전체를 잃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나는 고지 탈환을 결심하고 연대 내 2개 대대와 13연대에서 증파된 1개대대 병력으로 공격에 나섰다.

부연대장 임충식 (任忠植) 중령이 지휘하는 2개 대대를 주공 (主攻) 으로 국사봉 왼쪽에서, 1개대대는 조공 (助攻) 으로 고지 정면에서 각각 공격케 했다.

나는 1개중대 병력으로 정면 공격대대 후방에다 지휘소를 차렸다.

야음을 틈타 전병력을 공격출발선까지 진출시켜 놓은 다음 새벽 5시에 나는 일제공격 명령을 내렸다.

우리는 81㎜ 박격포의 엄호사격을 받으며 국사봉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나도 이규명 (李圭明) 이란 연락병 한명을 데리고 공격대대 바로 뒷쪽에서 전투를 지휘했다.

처음 우리의 공격에 당황해 하는 듯하던 북한군은 이내 반격을 해오기 시작했다.

우리가 국사봉 앞 넓게 트인 개활지에 도착했을 때다.

바로 내 앞에서 전진하던 연락병이 갑자기 "아" 하는 소리와 함께 땅위에 나뒹굴었다.

다리에 총을 맞은 것이다.

나는 손수건으로 총상 윗부분을 동여매주고 후송케 한 뒤 김정근이란 병사를 연락병으로 다시 지명해 계속 전진했다.

전투가 점점 치열해지면서 이번에는 정면공격을 맡고 있던 兪모 (이름은 잊었다) 대대장이 고지 바로 밑에서 적의 총탄을 맞고 쓰러졌다.

목에 유혈이 낭자했다.

나는 즉시 兪대대장의 후송을 명령하고 직접 대대장 위치에 서서 전투를 지휘하기 시작했다.

적의 총탄은 비오듯 쏟아지고 있었다.

포탄도 잇달아 떨어졌다.

여기저기서 비명이 들리고 희생자가 속출했다.

나는 죽을 각오를 했다.

'혈육인 아들 (성룡) 이 하나 있으니 나는 죽어도 죽지않는 것이다' 이런 생각도 했다.

그 순간이었다.

내 앞에 있던 金연락병이 "연대장님 위험합니다" 하고 외마디소리를 지르면서 나를 와락 뒤로 밀치는 것이었다.

넘어졌던 내가 정신을 차리고 앞을 살펴보니 金연락병이 머리에 총을 맞은 채 쓰러져 있었다.

얼른 그를 품에 안고 어떻게 응급치료라도 해보려 했으나 곧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때 김석원사단장이 후방에 도착하는게 보였다.

내가 본부의 포병지원을 받아서 공격하자고 건의하자 김장군은 이를 즉각 수락했다.

결국 이 국사봉은 그해 6월1일 육군본부가 옹진지구전투사령부 (사령관.金白一) 를 설치하고 포병의 지원하에 일대 반격을 개시하고서야 재탈환할 수 있었다.

군문에 들어 처음 치른 이 전투로 나는 커다란 마음의 상처를 입었다.

그 전투에서 우리 연대는 전사자 70여명과 2백여명의 부상자를 냈다.

그해 여름 인천에서 전몰장병 위령제를 지내던 날, 연대장 조사를 읽으며 나는 얼마나 눈물을 흘렸는지 모른다.

열악한 장비를 지워 병사들을 전투로 내몬 데 대한 미안함과 미숙한 지휘관으로서의 자책감 그리고 전몰장병들을 위로하는 심정이 뒤범벅이 됐던 것이다.

글= 강영훈 전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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