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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장? 잊은 지 오래… 더 넉넉해졌다면 알려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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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코노미스트 2004년 10월 “여의도 앞을 흐르는 강물처럼 자리에 연연하지 않겠다”며 은퇴를 선언한 김정태 전 국민은행장이 농사일에 푹 빠졌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얼굴이 얼마나 까맣게 탔을까. ‘스타 경영인’ 출신 농사꾼의 밭갈이는 무엇이 다를까. 대공황 이후 최악의 상황이었다는 글로벌 경제위기, 그는 어떤 목소리를 내고 싶었을까. 슬슬 궁금증이 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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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관심 없어, 잘 몰라요. 난 조용히 살고 싶은 사람이라니까!” 지난 9월 17일 오전, 가을 하늘이 높았지만 그 볕은 아직 따가웠다. 아직 여름이 기승을 부리는 거다. 경기도 고양시에 있는 ‘다와농장’에서 만난 김정태(62) 전 국민은행장은 밀짚모자를 밀쳐 올렸다.

‘농부 김정태’가 말하는 인생 2막 #시장 뒤흔들던 ‘장사꾼 은행장’에서 ‘농사꾼’으로 파격 변신 # 금융권 ‘컴백’ 질문에 “어허이, 참!”

‘스타 최고경영자(CEO)’로 금융권을 휘어잡던 얼굴이 아니라 특별한 묘사가 필요 없는 ‘100% 농부’였다. 전날 기자와 전화 통화에서 “오늘은 강정원 국민은행장 부친상에 다녀가느라 서울에 머무를 거다. 내일 농장에 가긴 할 텐데 인터뷰를 할 거면 오지 말라”고 조용하고도 단호하게 거절 메시지를 전달한 그였다.

농사꾼으로 변신한 ‘김정태’가 궁금해 다음날, 경기도 일산 어디라는 정보와 농장 이름, 그리고 지도 한 장을 달랑 들고 장항IC 앞 도로까지 달렸다. 오전 11시쯤 큰길을 벗어나 좁은 길목에 들어서자 목적지를 쉽게 찾을 수 있었다. 다와농장이라고 적힌 초록색 간판이 보였다.

채송화 화단이 잘 꾸며진 출입문을 지나 농장 안쪽으로 들어가자 맥주 몇 병이 놓인 테이블에 김 전 행장이 지인들과 둘러앉아 있었다. “(약간 얼굴을 찌푸리다 이내 밝은 표정으로) 아, 오지 말라니까. 우리 밤 따러 가야 하는데….” 경기도 화성시 매송면에 있는 밤나무 산을 얘기하는 듯했다.

그렇지 않아도 좁은 주차장에 큰 자동차가 몇 대 서 있어 ‘간밤에 만난 친구들과 함께 왔나’ 하고 짐작했는데 목요일마다 모이는 정예 멤버란다. 증권사·은행 출신 금융권 후배들이었다. 그는 “아침 6시30분에 나와 땅콩을 수확하고 밤을 따러 가려던 참인데”라고 연거푸 말했다.

그러면서도 젊은 기자를 불청객 대하듯 하지 않았다. 오히려 후배들을 뜰에 남겨두고 “차나 한 잔 하고 가라”며 실내로 안내했다. 밀짚모자와 스포츠 선글라스를 벗자 이마에 제멋대로 달라붙은 앞머리 아래로 새카맣게 그을린 얼굴이 모습을 드러낸다.

왼손엔 휴대전화를 들고 있는데 ‘선글라스와 비교해 좀 구식’이라고 하자 “이재용 삼성전자 전무가 선물해준 것”이라며 싱긋 웃는다.

“인터뷰할 거면 오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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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짚모자가 잘 어울린다’는 인사에는 “밀짚모자를 넥타이처럼 몇 개나 갖고 있다”고 답했다. 샐러리맨의 패션 포인트가 넥타이이듯 이제 그에겐 ‘멋쟁이 농사꾼’이 되는 첫 번째 포인트가 밀짚모자란 얘기다. 명함을 건네기도 전에 부인인 최경진(58)씨가 삶은 완두콩을 내왔다.

콩 하나를 입 속에 넣고 우물거리기도 전에 이름도 처음 들어본 떡과 땅콩이 기자 앞에 그득 쌓였다. 웃는 얼굴로 커피를 내 온 최씨는 “공기 좋고 나무 많은 곳이지만 조금만 나가면 대형마트며 편의시설이 다 있다”면서 “이렇게 좋은 곳이 또 어디 있겠느냐”고 자랑했다.

“땅콩이 땅속에서 나는 건 알고 있어요? 아, 사람들이 나무에 열리는 줄 알더라니까, 하하.” 그러면서 땀을 닦는 김 전 행장은 들은 대로 농사의 재미에 푹 빠진 것 같았다.

>> 밤을 따러 갈 계획이었다고요? 조금만 늦었어도 못 만날 뻔했네요.

“6시30분이면 여기서 아침밥을 먹어요. 제가 원래 은행 다닐 때는 아침형 인간이 아니었거든요. 9시 출근이면 거기에 맞춰서 일어났다고. 근데 완전히 변했어요. 요즘은 저녁에 9시 뉴스 딱 끝나면 이불 펴고 누워요.”

>> 9시 뉴스요?

“그게 세상일을 알려주는 유일한 매개체입니다.신문도 안 봐요.”

이쯤 되면 지난해 인터넷 논객 ‘미네르바’로 오해 받은 것이 무색하다. 김 전 행장이 이곳에 둥지를 튼 것은 지난해 5월. 잡초와 폐물건으로 가득한 땅을 구입해 1년3개월 만에 ‘그림 같은 집’을 만들어 놓았다. 만약 농장을 사들이면서 스톡옵션을 받았다면 그 수확 또한 꽤 됐으리라.

농장을 한 바퀴 둘러보면서 키우고 만드는 데는 도사라는 생각이 저절로 들었다. 다와농장은 정확하게 3471㎡. 1000평이 조금 넘는다. 그래도 옹골차다. 11월 수확을 앞둔 배추만 무려 2000포기다. 고추·상추·깻잎·가지·파프리카 같은 한해살이 작물은 물론 앵두나무·느티나무·소나무 같은 나무도 즐비하다.

여기에 봉숭아나무까지 잔뜩 심어 ‘식용부터 관상용, 미용까지’ 3박자를 갖췄다. 김 전 행장은 “농장에 심은 소나무 종류만 네 가지가 넘는다”고 덧붙였다. 그래도 아쉬운 게 있나 보다. “올해 하나 못 심은 게 호박이에요.”

“요즘 고민은 장미 농사 망친 일”

그런 그가 “요즘 고민이 있다”고 했다. 귀를 바짝 세운 기자에게 “이것”이라고 가르쳐준다. 색색의 장미가 둥그런 모양으로 피어 있는데 한눈에 봐도 많이 시들거나 죽어 있었다. 그는 “장미는 지난해 처음 길러봐서 통 모르겠다”며 “울타리 놓기가 뭐해 장미 넝쿨을 만들었는데 그것도 실패”라며 농장 입구 옆 담장을 가리켰다.

농장 한쪽에 있는 닭장에서 키우는 닭은 열댓 마리가 넘어 보였다. “얼마 전에 장닭은 다 잡아 먹고 알 낳는 닭만 남았어요. 계란 삶아 먹는 재미가 아주 좋아요.”이렇게 말하면서도 그는 쉬지 않고 그리고 능숙하게 곡괭이질을 해댄다. 그때마다 잡초가 너부러진다.

땅이 모자라 옆집 땅을 빌려 땅콩을 심고, 집 앞을 한참 벗어난 길가에까지 코스모스를 심었단다. 일찌감치 자리를 잡은 ‘김정태 사람들’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이들도 이미 자기 일을 하고 있었다. 불청객은 신경도 쓰지 않고 저마다 배추 고랑을 정해 배추벌레를 잡고 있었던 것.

머리에 수건을 두르고 손가락 끝으로 벌레를 쏙쏙 집어내는 그들 역시 전직 금융 간부로는 보이지 않았다. 김 전 행장의 일주일은 꽉 짜여 있다. 월요일에는 서울 광화문에 있는 사무실에 출근한다. “만나자는 사람을 일일이 농장으로 부를 수 없어서”라고 했다. 화·목·토요일엔 이곳에서 농사를 짓고, 수·금요일에는 수영하는 부인을 따라 운동을 다닌다.

일요일에는 손자·손녀가 찾아와 놀아주느라 바쁘단다. 농장 가운데 조립식으로 지은 작은 오두막이 있었다. ‘할아버지 김정태’가 손수 만들어준 손자·손녀의 놀이방이다. 이러니 골프는 아예 꿈도 못 꾼단다. “골프 치면 한나절이 금세 가는데…. 그러면 농사는 언제 지어요. (밭을 바라보며) 저것들한테 얼마나 미안한 일입니까.”

김 전 행장은 전남 광산군에서 농사를 짓던 농사꾼의 아들이다. 84년부터 주말마다 경기도 화성시에 있는 농장에서 농사를 지어왔다. 현직에 있을 때도 입버릇처럼 “은퇴 뒤엔 농사지으며 살겠다”고 말했다. 농사 역시 도(道)가 텄을 법하다.

>> 어떻게 하면 배추를 잘 기를 수 있나요?

“간단해요. 정성이지.”

>> 정성이오? 그렇게 간단한 겁니까?

“올해 배추 값을 보면 내년 가격을 예상할 수 있는데 그렇게 못하고 올해 값이 떨어지면 내년에 적게 심고 올해 값이 오르면 내년에 많이 심어버리는 거야.”

질문은 배추 얘기였는데 돌아온 답은 시장 얘기다. 배추 농사 20년에, 금융 농사 35년이니 어느 쪽도 아마추어는 아닌 것이다.
다와농장에 있는 농작물은 모두 농약을 치지 않은 유기농이다. 정말 그랬다. 30분이면 벌레를 다 잡을 수 있는 간단한 방법이 있는데, 그는 일일이 꼬물거리는 벌레를 손으로 잡았다.

현직 시절 김 전 행장은 ‘스피드 경영’으로 유명했다. 항상 5분 안에 중요한 결단을 내려야 했고 휴가는 ‘남의 일’이었다. 과거 어느 인터뷰에서 스스로 급한 성격을 단점으로 꼽은 적도 있다. 그랬던 그가 요즘 운전기사에게 “차선을 바꾸지 말라”고 한단다. “먼저 가서 뭐 하느냐”는 것이다.

“골프 치면 반나절이 금세 가는데…”

1시간여 동안의 ‘농장 투어’를 마치고 직접 수확한 열무로 만든 쌈과 물김치, 깻잎절임 등을 반찬 삼아 일행이 둘러앉았다. 여기선 피터 싱어의 『죽음의 밥상』이 나온다. 그는 이 책을 인용하면서 “저 멀리서 온 연어 빼고는 다 1㎞ 안에서 수확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말투에 은근히 자랑스러움이 묻어났다. 느긋하게 밥숟갈을 뜨면서 후배 부행장이 주가 얘기를 꺼냈다. 곧 김 전 행장의 타박이 나왔다. “이 사람은 만날 주가에만 신경 써”라더니 이내 달러 약세라는 말에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어 뭔가를 지시했다. 미국에 있는 딸이란다.

김 전 행장의 딸 운영(27)씨는 미국에서 직장생활을 하고 있다. 세상과 벽을 쌓았다고 했지만 역시 챙길 것은 챙기는 듯싶었다. 식사 중에는 금융 노조, 은행 텔러의 역할, 월급제도 등 금융에 대한 얘기가 끊이지 않았다. 김 전 행장은 “유럽에 갔을 때 텔러가 할 일을 기계가 하고 직원들은 상담 창구에 있는 것을 봤다”

“예전에는 은행보다 증권사 직원들이 일을 더 잘했다” 등등 한마디씩 거들며 맥주 한 잔으로 반주(飯酒)를 기울였다. 경기 회복에 대한 얘기도 오갔다. 하지만 뚜렷한 결론은 없이 닭 울음소리, 깻잎 양념 같은 소소한 얘깃거리로 빠져버렸다. 이제 기자가 ‘밥값’을 할 차례였다.

배추밭에 나가 배추벌레를 잡던 기자가 혼자 뜰에 앉아 있는 김 전 행장을 발견하고 슬그머니 다가갔더니 “뭘, 할 얘기가 없다니까 자꾸 그러네”라며 묻지도 않은 질문을 가로막았다.

>> 답답하지 않으세요?

“답답하지 않아요. 이제 관심 없는 걸.”

사실 그는 불명예 퇴진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있다. 라응찬 신한금융그룹 회장, 김승유 하나금융그룹 회장 등과 경쟁하다가 혼자 경주를 그만뒀으니 미련이 남을 법도 했다.

>> 대형 금융그룹 2~3개만 남아야 국제 경쟁력이 생긴다고 주장하셨는데요.

“그런 생각은 변함없어요. 그러나 그 과정에 개입하거나 관여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럴 처지도 아니고요.”

기자에겐 이런 대답이 조금은 아쉬워하는 듯 들렸다. “미련은 없다”고 단호히 얘기했지만 선글라스 속 눈빛을 확인할 길이 없었다. 요즘도 가끔 현직에 있는 후배들이 전화해 조언을 구한다고 했다. ‘누가 연락하느냐’고 넌지시 묻자 “그걸 뭐 내가 누구라고 얘기하겠어요?”라고 입을 다물어버린다.

이런 그에게서 과거 몇 시간씩 기자들과 인터뷰하면서도 지치기는커녕 논리로 압도하던 옛 모습이 보이는 듯했다. 최근 글로벌 금융위기 여파로 중징계를 받아 이슈가 된 황영기 KB금융그룹 회장과 연락한 적 있느냐고 하자 “사건의 본질을 잘 모르니 옳다 그르다 얘기할 수 없다”며 즉답을 피했다.

“아, 배추밭에서 벌레 잡고 있는데 자꾸 전화해서 물어보니 뭔 얘기를 하겠어”라는 그를 보니 기자들에게 최근 꽤 괴롭힘을 당한 모양이었다. 2004년에 비슷한 경험을 하시지 않았느냐고 어렵게 과거를 들췄다.

>> ‘관치의 희생양’이라는 논란이 있었는데, 원망스럽지 않나요?

“원망할 사안이 아닙니다. 그리고 더 이상 과거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젠 미래를 생각해야지요.”

조용한 곳에서 홀로 앉아 농사일을 하다 보면 문득문득 떠오를 것도 같은데 김 전 행장은 시원하게 속내를 드러내지 않았다.

>> 혹시 컴백할….

“어허이, 참!”

질문이 끝나기도 전에 단호한 헛기침이 들려왔다.

“이젠 아니라니까. 난 떠난 사람이야.”

배추밭에서도 투자 수익 올려

금융권도 아니고, 2005년에 거론된 정치권도 복귀 무대와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학생들을 가르쳤던 서강대에서도 곧잘 연락이 오는데 신경을 못 쓰고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지금 다른 인생을 어떻게 살지 고민하는 과정에 있어요. 노후는 미리 생각해야 하는데. 나도 은퇴하고서야 고민했으니 늦은 편이었지. 정해진 건 없지만 아마 사회봉사와 관련한 일을 하지 않을까. 돈은 내가 더 벌어서 뭐 할 거야. 소외된 사람들 돕는 데 관심을 두고 있어요.”

그는 2002년에 스톡옵션으로 얻은 이익의 절반인 66억원을 사회에 환원한 적이 있다. 여기서 화제를 돌렸다. 그는 2001년 9월 11일 미국에서 9·11 테러가 난 직후 주식을 사라고 해 많은 주목을 받았다. 당시 모두 주가가 폭락할 거라고 했지만 2001년 10월부터 7개월 동안 주식은 상승했다.

>> 투자 감은 여전하신가요? 수익 좀 올리셨어요?

“주식이 조금 있긴 있지. 배추밭에 있는데 증권사 직원한테 전화 왔더라고. 좀 사 봐라 그랬더니 많이 오르데. 이익을 조금 봤지, 허허.”

김 전 행장이 매수하라고 한 때는 지난해 말 코스피 지수가 900대까지 내려가고 더 떨어진다는 분위기가 팽배한 때였다.
“서울에 있으면 챙겨야 할 지표도 많고, 자료도 많고…. 매일 그것만 들여다보고 있으면 오히려 잘 몰라요. 여기에서는 간단명료하게 답이 나와요. 미국 다우지수? 여기서 그런 게 무슨 소용 있어.”

>> 여기 와서 달라진 것 중에 뭐가 제일 좋으세요?

“(오랫동안 고민하며) 표현하기 어려운데…. 뭐랄까 넉넉해졌다고 하면 알려나.”

이제 그만하고 가라는 김 전 행장에게 ‘배추벌레 100마리 잡고 가려고 했는데’라며 너스레를 떨자 “아, 그럼 빨리 들어가서 잡아”하는 불호령이 떨어졌다. 부인 최씨가 바리바리 싸준 고추·가지·땅콩을 들고 얼른 농장에서 나왔다. 이미 해가 서산을 넘었다.

‘표적 수사’ 논란과 ‘시장 수호자’ 별명 남기고 금융계 홀연 퇴장

금융인 김정태는 누구?

1947년 전남 광주 출생. 광주서중·광주일고를 나와 서울대 경영학과와 경영대학원을 졸업했다. 이른바 ‘엘리트 코스’를 밟은 뒤 첫발을 내디딘 곳은 조흥은행. 거침없어 보이는 김 전 행장이지만 은행에 입사하기 전 고배를 마신 적도 있단다. 한국화약(현 한화그룹)의 최종 면접에서 고 김종희 회장에게 ‘발탁’되지 못한 것. 김 전 행장은 “지금 생각하면 금융이 적성에 참 잘 맞고 이 길로 온 것이 신기하다”고 회고한다.

좀 더 경쟁적인 분위기를 원했던 김 전 행장은 증권계로 자리를 옮겼다. 대신증권에서 30대에 상무를 달고 1997년 동원증권(현 한국투자증권) 사장을 역임한 뒤 이듬해 주택은행장으로 은행권에 컴백한다. 동원증권에서부터 과감한 공격 경영과 그에 따른 성과로 유명세를 떨쳤기에 2001년 국민·주택 통합은행장에 내정됐을 때 이미 그는 대한민국 금융계를 대표하는 ‘스타 CEO’였다.

외환위기 당시인 1998년 주택은행장에 취임할 때 은행권 처음으로 스톡옵션(주식매입선택권)을 선택하면서 “월급을 1원만 받겠다”고 한 일화는 유명하다. 그는 취임 15개월 만에 주택은행 주가를 819% 올려놨다. ‘배수진’을 친 것이 완벽하게 성공한 비결. 은행을 경영하는 소신도 분명했다.

부실자산을 털어내려고 2913억원 적자를 감수하면서 국제 회계기준을 적용하는 등 그의 행보는 보수적인 은행권에서 유난히 주목 받았다. 대우그룹 여신을 1조원 넘게 줄였고, 정부가 부도 위기에 몰린 LG카드(현 신한카드)를 살리려고 손을 내밀었을 때 “주주 이외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는다”며 분명하게 ‘노(No)’라고 선을 그었다.

결국 그는 정권의 눈 밖에 났다. 2004년 9월 국민은행과 국민카드의 합병 과정에서 회계 처리가 기준에 맞지 않다는 이유로 금융감독위원회로부터 ‘문책 경고’라는 징계를 받았고, 그해 10월 은행장 자리에서 물러났다. ‘신(新)관치금융’ ‘괘씸죄’ ‘표적 수사’ 같은 논란과 ‘시장 수호자’라는 별명을 남기고 그는 홀연 금융계를 떠났다.

이후 서강대에서 명예경영학박사(2004년)를 받은 것을 계기로 대학 강단에 서기도 했다. 현재 한국투자금융지주 사외이사와 서남해안포럼 대표를 맡고 있다. 미국 경제지 비즈니스위크가 ‘아시아의 리더 25인’(2002년)에 선정했고, 포브스글로벌은 그를 표지 인물로 세우는 등 국내 최대 규모 은행의 수장을 맡은 그에 대한 소문은 외국에까지 번져나갔다.

“트랙터 몰고…새집 짓고…요양원 운영도…”

자연으로 간 각계 인사들

고향을 박차고 나와 대도시에서 잘나가는 사람들의 입지전적 이야기들은 차고 넘친다. 하지만 도심 속에서 누려오던 부와 명예를 놓고 다시 자연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그리 많지 않다. 귀농과 귀향을 택해 이제는 귀해진 이야기의 주인공이 된 일곱 명의 근황을 알아봤다.

▶휴대전화 제조업체 노키아티엠씨의 이재욱(68) 전 명예회장은 적자투성이 기업을 맡아 18년 만에 매출을 100배 이상 키운 스타 CEO였다. 이 전 회장은 2000년 인후암으로 큰 수술을 받고 2004년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다. 그가 귀농을 택한 것은 건강을 되찾기 위해서였다. 경남 마산시 진북면 영학리 학동마을이 서울 출신인 이 전 회장의 인생 2모작 터전이 됐다. 이 전 회장은 이곳에서 요양이 아닌 생업을 택했다. 그는 농부가 됐다. 트랙터를 직접 몰았다. 그의 ‘CEO DNA’는 농사를 지으면서도 변치 않았다. 그는 땅을 갈지 않고 파종 후 비료와 제초제를 한 번씩만 주는 ‘지장농법’을 고안해 보리 생산원가를 낮췄다.

▶이대우(66)씨는 IT업계의 잘나가는 사장님이었다. 그는 1997 큐닉스컴퓨터 CEO 자리를 물리치고 강원도 평창군 봉평면으로 내려왔다. 그는 흥정계곡 깊은 산속에 새집을 지었다. 벌써 12년째다. 딱따구리, 박새들이 그가 만든 새집에 둥지를 틀었다. 이대우씨는 어릴 적 꿈이었던 화가에서 새집을 지어주는 목공이 됐다. 이 경험을 바탕으로 몇 년 전 『새들아, 집 지어 줄게 놀러오렴(도솔오두막)』을 출간하기도 했다. 그는 이 책에서 “조금만 생각을 바꿨더니 우리 부부는 만족하며 살고 있다”고 말했다.

▶차광주(49)씨는 잘나가는 어린이 도서전문 보리출판사 사장이었다. 하지만 1997년 외환위기로 출판사 문을 닫아야 했다. 막연한 미래에 귀농을 생각한 적은 있지만 구체적 귀농 계획은 세우지 않았다. 차씨의 출발점은 생계형 귀농이었다. 그는 전국귀농운동본부에서 운영하는 귀농학교에 들어가 공부부터 시작했다. 그는 지금 충북 괴산군 청천면 사기막리의 이장이다. 20여 가구밖에 없는 마을이지만, 2005년에는 농업정책 소논문 대회에서 대상을 받기도 했다.

▶‘접시꽃 당신’의 도종환(56) 시인은 교직을 떠나며 충북 보은군 내북면 법주리 깊은 곳에 정착했다. 숲 속 깊은 곳에 있는 그의 황토집에는 아직도 많은 선후배 문인이 그를 보러 들린다. 도시를 떠나 살다 보니 자연스레 건강도 회복됐고 시작 활동도 활발해졌다. 지난해에는 처음으로 동시집을 냈다. 충북 보은 출신 문인들을 기리는 오장환문학관의 명예관장으로 단체관광객 가이드도 직접 맡고 있다.

한정연 기자·jayhan@joongang.co.kr

고양= 최은경 이코노미스트 기자·chin1chu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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