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시평] 한여름밤의 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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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다시 긴장되는 남북한 관계와 함께 계속 쏟아지는 언짢은 사회문제들은 한국의 장래가 밝지 않다는 우려를 가져다준다.

그러나 경제난국에서의 빠른 회복, 그리고 밝고 맑은 사회를 만들려는 시민단체운동의 활성화는 국제사회에서 우리의 저력과 성숙한 면모를 과시하며 한국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게 하고 있다.

그렇다면 21세기의 문턱에서 과연 우리는 선진국을 향한 도약단계에 와 있는가.

아니면 이런 기대는 단지 한여름밤의 꿈으로 그치고 말 것인가.

우리가 지난 20년간 경제선진국으로 발돋움하기 위해 많은 노력이 요구됐던 것처럼 이제는 사회 전반의 발전을 위해 그동안 등한시해 왔던 윤리.가치관을 재점검할 필요가 있다.

그중에서 중요한 과제들로 부정부패 척결, 남녀평등, 노인권익보호 및 사형제도 폐지를 꼽을 수 있다.

첫째, 부패는 정의로운 사회건설의 암적인 요소일 뿐 아니라 이제는 국제사회에서 각국의 발전을 가늠하는 중요한 척도가 됐다.

경제협력개발기구 (OECD).국제통화기금 (IMF) 및 유엔기구들은 이미 부패가 심한 국가들에는 원조나 자금제공을 보류하는 등 강경책을 쓰고 있다.

사회 전체에 만연되고 고질화돼 있는 부패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철저한 교육과 함께 극단적인 처방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60년대 말 뉴욕시는 경찰의 부패근절을 위해 문자 그대로 성역없는 함정수사를 펴 성공을 거두었다.

적게는 돈이 든 지갑을 주운 것처럼 경찰관에게 전해준 다음 그의 행동을 감시하는 것부터 마약 밀매업자로 가장한 특별수사관의 동원까지 다양한 방법을 사용했다.

미 연방수사국 (FBI) 은 지금도 공직자부패나 마약 및 총기단속에서 함정수

사를 쓰고 있다.

물론 이러한 방법을 사용할 때 도청 및 사생활침해 등 국민의 기본권이 유린당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우리의 경우 비리의 온상인 공공부문을 중심으로 국민의 모범을 보여야 할 국회 및 법조계를 포함한 고위 공직자들을 우선적 대상으로 하는 장기적인 함정수사를 펴야 할 것이다.

둘째, 국제수준에 비추어 볼 때 한국이 어김없이 낙제점을 받는 분야는 남녀평등의 보장이다.

노인권익보호도 별다를 것 없이 저조하다.

한국사회는 한마디로 국민의 반수인 여성과 55세가 넘은 노인 아닌 노인들의 참여 없이 움직이고 있다.

최근에 성희롱법 통과 및 여성특별위원회의 적극적인 활동으로 여성권익보호운동에 물꼬가 트인 것 같이 보인다.

그러나 진정한 남녀차별을 몰아내기 위해서는 여성을 보조적인 역할수행자나 상업적인 대상으로 전락시키는 행위는 사라져야 한다.

미스코리아와 같은 시대착오적인 행사나 TV뉴스에서 여자앵커에게는 언제나 보조적 역할만을 부여하는 관행은 시정해야 한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놀이방 등의 탁아소시설을 전국적으로 확대, 운영해 여성의 사회진출을 위해 자녀부양의 부담을 덜어주는 것이 필요하다.

특히 정부 차원에서 세계 최하위 수준인 한국 여성의 고위직 진출을 위해 쿼터제를 도입해야 한다.

건국 이후 정규대사 (大使) 로 임명된 여성이 하나뿐인 사례는 헌법에 남녀평등권을 부여한 나라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국제기구의 통계에 의하면 한국은 여성국회의원 수나 정치.경제.사회 분야에서 결정권을 가진 고위직 여성의 수에서 시리아.튀니지 등 아랍국가들의 수준에도 못 미치고 있다.

노인권익 문제에 있어서 나이만으로 직장을 떠나게 하는 것은 위헌이며 인권유린이라는 것이 세계적으로 새롭게 부상되고 있다.

반면에 한국 사회는 50대 중반이면 '명퇴' 로 밀려나고 60이면 사회에 기여할 수 없는 잉여인간으로 취급되는 등 현대판 고려장을 연출하고 있다.

세계 노인의 해를 맞아 유엔은 '활동적인 노년보장' 을 올해의 주요 테마로 내걸었다.

즉 노인의 지속적인 사회참여를 통한 기여를 제도적으로 보장하는 한편 건강이 허락하는 한 활동적인 삶을 영위해 가족과 사회에 부담이 되지 않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도 최소 60대 후반까지는 연령차별 없이 능력과 개인의사에 따라 일할 수 있는 법적 조치를 마련해야 한다.

이외에도 이미 65개국에서 불법화된 사형제도의 폐지나 사형집행의 일정기간 정지를 고려해봐야 할 것이다.

한국은 이제 경제발전이라는 메달 하나로 선진국의 대열에 끼려는 꿈에서 벗어날 때가 됐다.

깨끗하고 정의로운 사회구현, 인권존중 및 복지향상 등 사회 전반에 걸쳐 우수한 종합점수를 기록할 때 비로소 진정한 의미의 선진국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유삼열 유니세프 특별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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