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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유신헌법 대통령 선출 방식, 내가 봐도 엉터리”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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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2호 07면

1970년대 한국 경제의 고속성장을 이끈 주역인 남덕우(85·사진) 전 국무총리가 회고록을 냈다. 『경제개발의 길목에서』란 제목의 남 전 총리 회고록은 22일부터 시판된다. 중앙SUNDAY가 단독 입수한 그의 회고록엔 경제학자로 정부를 비판하다 정부에 참여해 ‘한강의 기적’을 만든 이야기가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차분하게 정리돼 있다. 박정희 대통령의 정치자금 조달 및 사용법, 이른바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에 대한 일화도 나와 있다. 자신을 총리로 부른 5공의 전두환 대통령이 차기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라고 권유한 이야기, 그걸 사양하고 서울 삼성동 무역센터 건립에 전념한 사연 등도 적혀 있다.

1970년대 경제 성장과 이면, 남덕우 회고록 독점 입수

남 전 총리는 1969년 서강대 교수로 활동하던 중 재무부 장관에 발탁됐다. 이후 10여 년간 재무부 장관,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을 지냈다. 교수 출신이 각료로 장수하는 드문 기록을 세운 것이다. 5공 출범의 정치적 격변기 때 총리를 지냈으며, 이후 9년 동안 무역협회장을 맡아 무역한국의 길을 닦는 데 기여했다. 남 전 총리는 “회고록에서 지난날 경제정책의 명암을 함께 설명했다”며 “개발연대의 경제정책을 후대가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고, 그들이 선대의 공과를 거울로 삼는 자료가 됐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말했다. 남 전 총리에게 회고록을 쓰라고 권유한 최우석 전 삼성경제연구소 부회장은 “회고록을 보면 파란과 격동이 점철했던 개발연대의 여러 일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며 “그 당시 이해하지 못했던 것들을 많이 알 수 있는 만큼 남 전 총리의 회고록은 한국 경제개발의 생생한 증언이자 산 역사”라고 평했다.

“나도 박정희 누런 봉투 받아”
남 전 총리는 “박정희 대통령이 정치자금을 거둔 것은 사실”이라면서도 “박 대통령이 자신의 사적인 목적을 위해 돈을 거두거나 쓰는 것을 보지 못했고, 들은 적도 없다”고 기록했다. “박 대통령은 공화당 재정위원장을 통해 정치자금을 거두었고, 그 액수와 용도를 엄격히 통제하려 했다”고 밝혔다. 다음은 박정희의 정치자금과 관련한 남 전 총리의 회고.

남덕우 전 총리의 회고록 『경제개발의 길목에서』

『박 대통령은 부정부패 문제를 언제나 고민하고 있었다. “그놈의 정치를 하자니 정치자금을 걷지 않을 수 없고, 정치자금을 걷자니 부정을 묵인할 수밖에 없으니 어쩌면 좋으냐”고 나에게 물었다. 당시에는 큰 기업이 여당 재정위원장에게 접근해 현금차관, 정부 공사, 특별융자 같은 특혜를 얻기 위해 정치자금을 헌납하면 재정위원장은 관계 당국에 부탁해 기업의 요구를 들어주도록 하는 게 예사였다.

나는 대통령에게 건의했다. “앞으로 재정위원장 요구는 일절 거절하겠습니다. 기업이 신청하는 사업은 엄정히 심사해 인허가 여부를 결정하되 특혜를 받는 기업이 있으면 재정위원장에게 정보를 주겠습니다. 그러면 재정위원장이 기업과 접촉해 사후적으로 자금 헌납을 받을 수 있을 겁니다. 박 대통령은 내 건의에 찬성했다. 앞으로 재정위원장이 누구에게서 얼마를 걷었고, 당비로 얼마나 썼는지를 매월 보고하게 할 것이니 재정위원장이 제출할 보고서에 내 도장을 찍으라는 것이었다. 나는 명령대로 매월 말 재정위원장 보고서에 도장을 찍었다. 박 대통령은 이를 통해 정치자금과 당비를 통제했다.

박 대통령 집무실에 들어가면 그 분이 여러 개의 누런 봉투에 무엇인가 쓰고 있는 것을 나는 가끔 봤다. 그것은 정치인이나 퇴역한 군부 장성들에게 보내는 봉투였다. 내가 그 사실을 아는 것은 나도 여러 번 봉투를 받았기 때문이다. 당시 장관들이 언론 대책과 국회 대책으로 비자금을 쓰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박 대통령이 보내 준 봉투가 나를 (부정부패의 문제에서) 구해 줬다. 국회가 열렸을 때나 외국 출장을 갈 때마다 봉투가 내려 왔고, 경제기획원에 있을 때엔 예산국회가 열릴 때마다 큰 봉투가 전달됐다. 나는 그것을 예산국장에게 넘겨주고 직원들의 사기를 진작했다. 박 대통령의 봉투는 국회가 돌아가는 윤활유 역할을 했다는 생각이 든다. 박 대통령은 그것이 옳은 일이 아님을 알면서도 직무수행을 위해 불가피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부가가치세로 10대 총선 결과 저조, 경질
남 전 총리는 1969년 10월 재무장관에 임명됐다. “서울 화곡동에서 가족과 함께 살 집을 짓는 공사를 감독하다 연락을 받고 흙 묻은 구두를 신은 채 청와대 접견실로 들어갔다”고 한다. 박 대통령은 “남 교수, 그동안 정부가 하는 일에 비판을 많이 하던데 이제 맛 좀 봐”라고 말했다고 한다. 남 전 총리는 재무장관으로서 세무·관세 행정 현대화의 기틀을 잡았고, 은행 자율화를 추진했다. 72년엔 사채를 동결하는 8·3조치로 기업의 금융비용을 줄여 경제난국을 돌파했다.

74년 경제부총리로 승진한 다음엔 중화학공업을 육성하는 데 주력했고, 부가가치세를 도입해 천차만별이던 거래세를 단순화했다. 그러나 부가가치세에 대해 영세 상인이 반발하는 등 여론이 좋지 않아 여당이 10대 총선(78년 12월)에서 저조한 성적을 거두자 10개 부처 장관과 함께 경질됐다. 그럼에도 이듬해 1월 대통령 경제특보로 임명됐다. 그는 특보 시절 박 대통령에게서 이런 말을 들었다고 한다. “내가 봐도 유신헌법의 대통령 선출 방법은 엉터리야. 그러고서야 어떻게 국민의 지지를 받을 수 있겠어? 헌법을 개정하고 나는 물러날 거야.”

남 전 총리는 그때의 기억을 이렇게 적었다. “나는 크게 놀랐다. 박 대통령이 왜 법률특보(신직수 전 법무장관)를 임명했는지 짐작이 갔다. 신직수씨는 같은 특보로 있으면서 동료들에게 일절 함구무언이었다. 후일에 알고 보니 신직수씨는 (유신)헌법 개정안을 연구하고 기초하라는 박 대통령의 밀명을 받고 있었다. 후일(79년 10월 박 대통령이 서거한 이후) 신씨를 만났을 때 ‘당시의 자료를 어떻게 했느냐’고 물었더니 그는 ‘전부 소각했다’고 대답했다.”

전두환에 “DJ 사면” 건의
남 전 총리는 1980년 9월 2일 국무총리가 됐다. 전두환 당시 대통령은 그에게 사령장을 주면서 “중책을 맡게 됐으니 잘해 보자”고 했다 한다. 남 전 총리는 “구시대의 인물이 새 정부에 남아 있으면 폐가 된다”며 “과도기를 넘기면 곧 사임할 테니 양해해 달라”고 말했다 한다.

그는 총리로 취임한 다음 날 ‘김대중(DJ) 내란음모 사건’의 공판이 사흘 뒤에 열린다는 걸 보고받았다.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의 특사는 이날 전두환 대통령을 만나 DJ 사건에 대한 미국의 입장이 담긴 친서를 전달했다. 남 전 총리는 “미국 특사가 다녀가자마자 선고 공판을 하면 문제가 있다”고 판단했다고 한다. 그래서 신병현 경제부총리, 김경원 대통령 비서실장과 함께 전 대통령을 만나 공판 연기를 건의했다고 밝혔다.

전 대통령이 “대통령이 사법절차에 간섭할 수 있는가”라고 하자 세 사람은 “간섭할 수는 없지만 판결 후에 사면권을 행사할 수는 있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군법회의는 9월 17일로 연기됐고, DJ에겐 사형이 선고됐다. 81년 1월 23일 대법원은 원심 판결을 확정했다. 전 대통령은 다음 날 특별사면권을 행사해 DJ의 형을 무기징역으로 감형했다(5공 정권은 82년 말 DJ를 형 집행정지로 석방). 그리고 나흘 뒤 미국을 방문했다. 남 전 총리는 “전 대통령이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하면서 김대중씨 문제에 대한 조치 방침을 이야기하고 (미국 행정부의) 주한미군 철수 계획을 최종적으로 백지화하고 돌아왔다”고 밝혔다.

그는 81년 말 정기국회에서 새해 예산안이 통과되자 총리직 사의를 표명했다. “전 대통령이 만류했으나 ‘야당 의원들이 나를 보면 박정희 대통령을 생각하게 된다고 하니 물러나는 게 맞다’고 말했다”고 한다. 남 전 총리는 83년 11월 무역협회 회장으로 취임했다. 이듬해 전 대통령은 남 전 총리에게 차기 대통령 선거 출마를 권유했다고 한다. 다음은 남 전 총리의 회고.

『84년 여름 전 대통령 초청으로 안가에서 저녁식사를 함께 했는데 “이 다음 대통령 선거에 출마할 생각이 없느냐”고 묻는 것이었다. 노태우 장군이 당연히 차기 후보가 될 걸로 믿고 있던 나에게는 의외의 말이었다. 아마도 전 대통령은 만일에 대비해 문민 후보를 물색해 두려는 게 아닌가 생각했다.

나는 “대통령이 될 만한 위인이 못 된다”고 정중히 사양했다. 그것이 나의 진심이었다. 며칠이 지나 청와대에서 우리 부부를 만찬에 초청한다는 연락이 왔다. 또다시 출마 이야기를 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 전에 백영훈 박사가 경영하는 한국산업개발연구원(KID)이 제출한 무역센터 건설에 관한 용역 보고서가 있었다. 급한 김에 그것을 바탕으로 무역센터 건설계획안을 만들어 청와대에 들고 갔다.

예상대로 전 대통령은 출마 이야기를 꺼냈다. 나는 또다시 간곡히 사양하고 “제가 꼭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라고 한 후 가지고 간 차트를 꺼내 설명하기 시작했다. “경제를 자랑하는 한국이 88올림픽 때 외국인들에게 보여줄 것이 무엇이냐”고 반문하면서 “88년까지 세계에 자랑할 만한 한국의 무역센터를 지어놓겠다”고 다짐했다. 전 대통령은 설명을 듣고 나더니 “무역특계자금을 잡다한 용도에 써 버리는 것보다 이 사업에 투자하면 남는 것이 있을 것”이라며 찬성을 표시했다.』

“정치 때문에 경제장관 바꾸면 안 돼”
남 전 총리는 스스로를 이렇게 평가했다. “경제학자로서 자기의 주견은 있었으나 그것을 실현할 수 있는 정치적·행정적 수단이 모자라 주위 환경과 타협하는 정부 관료에 불과했다.”

그러면서 반성해야 할 점도 밝혔다. “토지 정책을 수립하지 않고 개발 정책을 추진한 결과 부동산 투기와 땅값 상승이 언제나 정부를 괴롭혔고, 오늘날에도 이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있다. 토지의 사유권은 인정하되 이용권을 사회화하는 방향으로 토지정책을 확립했어야 했다. 1972∼74년에 시행한 기업 공개와 기업 집중 및 부실화 방지 정책을 일관적으로 추진하지 못했기 때문에 97년 외환위기를 불러오게 됐다.”
그는 “정치적 국면 전환을 위해 빈번히 경제장관을 바꾸는 것은 대통령 자신에게 확고한 목적의식이나 경륜이 없거나 사람 보는 눈이 없다는 걸 의미한다”고 지적했다. “정책의 일관성이 없다면 그것은 장관보다 대통령에게 원인이 있는 것”이라고 꼬집었다.

남 전 총리는 “우리는 지금까지 동해 건너 일본과 태평양 건너 미국을 바라보며 살아 왔지만 이제 황해 건너편의 중국을 위시해 동북아로 눈을 돌릴 때가 왔다”며 동북아 개발은행, 동북아 안보협의기구(NASO·Northeast Asia Security Organization)의 설립을 촉구했다. 또 한국을 동북아 물류 중심지로 개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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