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곳곳서 설탕 전쟁, 한국서도 “세금 내려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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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2호 28면

이슬람권 금식월인 라마단엔 설탕 소비가 늘어난다. 음식으로 섭취하지 못한 영양을 가장 싸게, 가장 신속히 설탕 녹인 물로 보충할 수 있기 때문이다(삼양사 남주헌 팀장). 하지만 지난달 22일부터 시작된 라마단에서는 극심한 설탕 품귀 현상으로 곤욕을 치른 이슬람권 국가가 꽤 됐다.

설탕이 뭐기에 …

파키스탄 남부 카라치 시에서는 설탕과 식량 부족으로 소요가 발생해 20여 명의 부녀자와 어린이가 죽기까지 했다. 밀수와 매점매석도 횡행했다. 유수프 라자 길라니 총리는 국민에게 설탕을 아껴먹자고 호소했다. 모범을 보인다며 요리사에게 달콤한 음식을 만들지 말라고 지시하기도 했다.

설탕 생산 대국인 인도마저 ‘설탕 위기(sugar crisis)’를 겪고 있다. 인도 정부는 이달 15일부터 청량음료 제조업체가 설탕 재고를 15일치만 보유할 수 있도록 했다. 원당에 대한 부가세 면제를 내년 12월까지 연장했고, 내년 3월까지 백설탕 100만t을 수입하기로 했다. 인도 정부는 설탕 소비가 많은 힌두교 축제를 앞두고 설탕 부족이 초래할지 모를 민심 이반을 걱정하고 있다. 미국에서는 식품회사들이 들고일어났다. 크라프트 푸즈, 제너럴 밀스, 허쉬, 마스 등 내로라하는 식품회사들은 연방정부에 초콜릿바·시리얼·쿠키·껌 등 수천 개 상품의 제조에 들어가는 설탕이 크게 부족하다며 설탕 수입 제한을 완화해 줄 것을 지난달 요청했다. 이들이 보낸 서한에는 오바마 행정부가 요청을 거부할 경우 식품 값을 올리고 근로자를 해고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반 협박성’ 내용도 포함돼 있었다. 한국도 무풍지대가 아니다. 국회가 설탕 관세율을 낮춰 설탕 값 인하를 유도하는 방안을 논의하자 제당업체가 강력 반발하고 있다.
 
적게 내린 비가 설탕 대란 주범
설탕 원료인 사탕수수를 가장 많이 재배하는 나라는 브라질과 인도다. 두 나라는 생산 시기가 다르다. 북반구와 남반부에 위치해 계절이 정반대이기 때문이다. 인도의 사탕수수 수확기는 10월부터 6~7개월간이다. 브라질의 수확기는 5월부터 6~7개월간이다. 다년생인 사탕수수는 1년 반 정도 자란 것을 수확한다. 사탕수수 뿌리를 5월에 심으면 다음 해 10월 수확을 시작할 수 있다. 5년 정도 수확하면 휴경이 필요하다. ‘땅의 힘(地力)’이 고갈되기 때문이다.

인도의 사탕수수 생산량이 줄어든 것은 강우량과 재배면적이 줄었기 때문이다. 올 6~8월 엘니뇨 현상과 기후변화로 사탕수수 성장기인 인도엔 비가 적게 내렸고, 수확기인 브라질엔 비가 많이 내렸다. 인도의 사탕수수 재배지는 관개시설이 돼 있지 않다. 천수답이나 다름없다. 인도의 6~8월 강우량은 50년 평균치에 비해 52%나 부족했다. 이달 들어 비가 많이 내리긴 했으나 생산 감소는 피할 수 없는 실정이다.

설탕 값이 몬순 가뭄을 재료로 급등하기 시작한 것은 6월 마지막 주였다. 8월 초엔 투기세력까지 가세해 28년 래 최고가를 기록했다. 이달 들어 비가 많이 내리긴 했으나 수급이 근본적으로 개선되지 않을 것이란 분석이 고개를 들면서 설탕 값은 다시 오르기 시작했다. 강우량 부족뿐 아니라 인도 정부의 정책 실패도 설탕 값을 끌어올리는 데 한몫했다. 뉴욕 타임스는 지난달 “인도 정부가 설탕산업에 과도하게 개입한 나머지 수입국으로 전락하는 처지가 됐다”고 꼬집었다.

인도 설탕생산협회 제인 사무국장은 “인도 정부가 다른 작물에 대해서는 수매가격을 70% 넘게 올려줬지만 사탕수수는 그 절반에도 못 미치는 24%만 올려줬다”며 “사정이 이렇다 보니 농민들이 사탕수수 재배에 흥미를 잃는 건 당연하다”고 말했다. 사탕수수 수확을 늘리려면 1년 반 이상이 걸린다. 인도 전문가들은 올해 생산량이 1350만~1450만t에 불과해 재고분을 감안하더라도 650만t 정도를 수입해야 하고, 수입 없이 자체 수급을 맞추려면 2011년은 돼야 할 것으로 예상했다. 인도는 지난해만 해도 2800만t을 생산해 500만t을 수출했다.

브라질도 에탄올 생산하느라 여력 없어
인도보다 더 많은 사탕수수를 재배하는 브라질은 생산량의 변동폭이 크지 않다. 관개시설이 갖춰진 대규모 영농을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탕수수로 원당을 만들고, 이 원당으로 다시 에탄올을 만들면서 사정이 달라졌다. 에탄올과 설탕에 각각 투입하던 사탕수수 비율은 종전 1대1에서 지난해 2대1로 역전됐다. 국제유가가 크게 오른 데다 브라질 내 에탄올 차량의 보급이 늘어났기 때문이다. 올 들어 설탕 값이 오르긴 했으나 브라질은 이미 투자된 에탄올 시설을 가동하느라 설탕 생산을 크게 늘릴 형편이 못 된다.

반면 설탕 수요는 꾸준히 늘고 있다. 설탕 소비가 가장 급격히 늘어난 나라는 ‘자원의 블랙홀’ 중국이다. 우리나라도 해마다 0.5% 정도씩 설탕 소비량이 증가하고 있다. 공급은 인도나 브라질에 지나치게 의존하고 수요는 세계적으로 줄어들기 힘든 구조다. CJ제일제당 박창민 팀장은 “작황이 안 좋으면 쉽게 가격이 급등하는 구조”라고 말했다. 설탕 값이 뛰면서 세계 각국에선 ‘설탕 안보론’마저 대두하고 있다. 시리아와 인도네시아가 지난해 이후 100만t 정제 설비를 확보한 것을 비롯, 사우디아라비아·이스라엘·이집트·알제리·중국 등이 국가 주도로 시설 확충에 경쟁적으로 나서고 있다. 설탕 값이 오르는 것을 즐기는 나라도 있다. 호주의 경우 내년 사탕수수만으로 10억 달러를 더 벌어들일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쌀처럼 정치적으로 민감한 설탕
다른 식품소재와 달리 설탕에는 고율의 관세가 붙는다. 밀 1.8%, 밀가루 4.2%, 대두 3.0%, 대두유 5.4% 등으로 대부분 관세율이 낮다. 하지만 원재료인 원당은 3%(현재는 한시적 무관세)인 데 반해, 설탕 완제품은 40%(한시적으로 35% 할당관세)의 관세가 붙는다. 한국만 높은 게 아니다. 일본은 314%나 되고, 미국은 125%, 태국과 중국은 각각 60%, 50%다. 설탕 대국 인도마저 60%의 관세를 물리고 있다. 유독 설탕 관세가 높은 것은 국제 설탕 값을 좌지우지하는 유럽연합(EU)의 덤핑 수출 탓이다. 사탕무 생산지인 EU는 역내 농민 보호를 위해 막대한 보조금을 주며 역내 가격의 반값 수준으로 설탕을 해외 시장에 밀어내고 있다. 지난해 9월 기준 EU 역내 설탕 가격은 t당 780달러인 데 반해 수출가격은 400달러였다. 결국 설탕 고(高)관세는 EU의 덤핑 공세로부터 자국 제당산업을 보호하기 위한 ‘방어수단’인 셈이다. 덤핑 수출의 장본인인 EU조차도 수출된 물량이 되돌아오는 것을 막기 위해 260%의 높은 관세 장벽을 치고 있다.

설탕을 원료로 사용하는 가공식품업계는 관세율을 낮춰 설탕 값이 떨어지면 관련 식품 가격도 덜 오를 것이라고 주장한다. 제당업계는 이에 대해 10년 새 설탕 값이 12%가량 떨어졌으나 과자·사탕류는 50% 이상, 음료와 빵 가격은 각각 27%, 24% 올랐다고 반박한다.

관세를 낮추면 설탕 가격이 내려갈 것으로 기대하는 게 상식이지만 외국 사례를 보면 꼭 그런 것은 아니다. 설탕을 무관세로 수입하는 싱가포르와 홍콩의 설탕 가격(지난해 8월, 3㎏ 기준)은 각각 7899원과 5135원으로 한국(3270원)에 비해 높았다. 월마트 등 유통업체들이 국제 설탕 시세 급등락, 재고 유지에 따른 위험을 피하기 위해 높은 마진을 붙이기 때문이라는 게 제당업계의 설명이다.

남주헌 팀장은 “국내 제당 시설이 국제 설탕 값 변동의 영향을 줄여주는 완충 역할을 한다”며 “국내 시설을 사장시키는 관세 인하는 국내 소비자에게 결코 이로운 게 아니다”고 말했다. 그러나 물가를 잡아야 하는 정부나 정치인 입장에선 관세를 낮추고 싶은 유혹에 빠지기 쉽다. 가공식품업계의 요구도 만만치 않다. 여러 나라에서 설탕은 정치적 상품이고, 설탕 값은 정치적 흥정의 산물이다. 그런 점에서 설탕은 빛깔만큼이나 쌀을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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