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독학하고 현장에서 살아, 나중엔 바닷물이 말 걸더라

중앙선데이

입력

"중앙선데이, 디시전메이커를 위한 신문"

“20세기가 ‘블랙 골드(black gold)’의 시대였다면 21세기는 ‘블루 골드(blue gold)’의 시대가 될 것이다.” 얼마 전 미국 경제전문지 ‘포춘’에 실린 기사 내용이다. 블랙 골드는 석유를, 블루 골드는 물을 가리킨다. 물 산업은 이제 ‘푸른 황금’이라는 별명을 얻을 만큼 화려하게 조명받고 있다. 세계 물 시장 규모가 2012년 600조원, 2015년 1600조원에 이를 것이란 전망도 나와 있다. 안심하고 마실 수 있는 음용수, 깨끗한 산업용수를 확보하는 기술이 성장 산업으로 떠오른 것이다. 이미 프랑스 베올리아·온데오 같은 물 기업은 수조원대 매출을 올리고 있다.

여기에 비하면 한국은 아직 걸음마 단계다. 코오롱·웅진 등 대기업이 물 산업에 출사표를 던졌지만 아직 큰 성과는 나오지 않고 있다. 이런 가운데 산업용수 분야에서 한참 앞서가는 인물이 있다. 이규철(71·사진) 한국정수공업 회장이다. 1959년 창업한 한국정수는 오직 수(水)처리 한길만을 걸어온 회사다. 그는 자타가 공인하는 국내 수처리 1인자다. 국내 원자력·화력 발전소 110여 곳에 수처리 설비를 독점 공급하고 있다. 중동·아프리카 산업용수 시장에도 진출해 연 500억원대 매출을 올리고 있다. 한국정수공업은 최근 경기도 여주에 공장을 짓고 ‘에이수(水)’라는 브랜드로 먹는 샘물(음용수)을 출시했다. 10일 오후 경기도 안산 반월공단에 있는 정수공업 본사에서 이 회장을 인터뷰했다. 그는 기자가 자리에 앉자마자 화이트보드에 복잡한 화학식을 써가면서 물에 대해 ‘맹렬하게’ 설명했다.

-물로 500억원 매출 올리기가 싶지 않을 것 같다.
“우리 회사는 물을 파는 게 아니다. 주력 상품은 발전소와 정유·반도체 공장 등에 반드시 필요한 복수탈염설비(CPP)다. CPP는 초(超)순수를 만드는 장비다. 수중의 이온 성분을 완전히 제거해 말 그대로 ‘깨끗한 물’을 만들어 준다. 초순수는 발전설비의 배관 부식이나 이끼 끼는 것을 막아준다. 반도체·의약 공장에서는 세척·세정제로 주로 쓰인다. 한국정수는 2000년대 초반 ‘IMR’이라는 독특한 방식의 초순수 설비를 개발했다. 쉽게 말해 화공약품이 전혀 들어가지 않은 친환경 초순수 생성 시스템이다. 이렇게 첨단의 초순수 생산 능력을 갖춘 회사는 한국정수를 비롯해 독일 지멘스, 영국 크리스트케니컷 등 전 세계 3곳뿐이다.”

-그럼 국내 시장을 독점하고 있겠다.
“(웃으면서) 덕분에 국정감사에서 단골로 도마에 오른다. 국내 원자력 발전소 30곳, 화력 발전소 80여 곳이 모두 우리 제품을 쓰고 있는데 ‘왜 그 회사에만 물량을 몰아주느냐’는 지적을 받아서다. 그런데 우리밖에 기술이 없는데 어쩌란 말이냐.”

-어떻게 초순수 설비 개발에 나섰나.
“독학(獨學)했다. 국내에 관련 자료와 경험자가 전혀 없어서 외국 문헌을 일일이 뒤졌다. 그런 다음 현장에서 살았다. 분진을 하루 수십g씩 삼켰을 거다. 이론적으로 증명되지 않으면 넘어가지 않았다. 어느날은 바닷물이 벌떡 일어나 말을 걸기도 하더라. 그러면서 해법이 보였다.”

그의 독학 이력은 대학 때부터 시작됐다. 전북 군산고를 나와 4년 장학생으로 조선대에 입학했는데 교수의 강의 실력이 ‘아니올시다’였단다. 이때부터 “먼저 목차를 10번 외우고, 머리로 이해하지 않으면 절대 책장을 넘기지 않는다”는 ‘이규철식(式)’ 학습법이 몸에 밴 것이다. 이런 방법으로 나중에 직장 생활을 하면서 기술고시에 합격했고, 기술사 자격증도 두 개나 땄다. 과학 매니어로 요즘엔 양자역학 공부에 푹 빠져 있단다.

-해외 진출은 언제 했나.
“7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한국정수는 서울 신대방동 주유소 옆에 있던 ‘변소만 한 회사’였다. 사업을 키우겠다는 욕심으로 정부 정책자금을 빌려 반월공단으로 이사를 갔는데 80년 이란·이라크 전쟁이 터졌다. 전후 복구사업으로 이라크 남부에 있는 하사발전소 보수공사가 있다는 소식을 텔렉스로 받았다. 곧바로 사지(死地)로 날아갔다. 이때 발전소에 있던 불발탄 8개를 치워주고 공사를 따냈다. 내가 학군장교 1기다. 병기장교 출신으로 중동에서 능력을 발휘한 것이다. 여기서 630만 달러짜리 공사를 따냈는데 보름 만에 공사를 마무리하고 500만 달러의 이익을 냈다. 이때부터 은행 빚이 하나도 없다. 수주도 계속했다. 지금 수주 잔액이 1000억원이 넘는다.”

이렇게 기업 간(B2B) 비즈니스에서 기반을 닦은 한국정수는 지난 3일 ‘에이수(水)’라는 먹는 샘물 신제품을 내놓았다. 연 5000억원 규모로 성장했지만 먹는 샘물 시장은 경쟁이 치열한 레드 오션이다. 이에 대해 이 회장은 “자연의 원리를 그대로 담은 알칼리수로 차별화할 것”이라고 말했다.

-에이수는 뭐가 다른가.
“대부분이 산성수인 기존 제품과 완전히 다르다. 에이수는 pH(수소이온 농도지수)가 9.1~9.9인 알칼리수다. 경기도 여주에서 채수한 암반 지하수에서 망간·소듐 같은 이물질을 걸러낸 다음 칼슘·마그네슘·칼륨 등 미네랄이 풍부한 특수 광석과 알칼리 생성 장치를 통과시켜 만든다. 알칼리수는 일반 물보다 입자가 작아 몸에서 빠르게 흡수되고 배출돼 우리 몸의 세포를 노화시키는 활성산소를 줄여준다. 또 만성설사나 변비, 소화불량에 효과적인 것으로 인정받고 있다. 벌써 수출도 했다. 미국과 트리니다드토바고에 100만 병이나 팔았다.”

-생산하자마자 수출이라니?
“해외에서 우리 이름을 더 많이 알아준다. 이미 미국 현지법인도 세웠다.”
이런 설명을 하면서 이 회장은 둥근 삼각기둥처럼 생긴 500mL들이 물병을 내놓았다. 병 포장이 고급스러워 보인다고 하자 이 회장은 “브랜드와 디자인 개발에 1억5000만원을 투자했다”고 말했다. 한국정수는 알칼리 환원수 개발에 지금까지 60여억원을 투자했다. 이 회장은 “여기서 핵심이 알칼리 생성 장치인데, 50년 수처리 노하우 덕분에 가능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사업이 안정적이어서 그대로 안주해도 될 것 같은데, 소비재 사업에는 왜 뛰어들었나.
“나는 물과 결혼한 사람이다. 그 행복을 이제 사회와 가정에 나눠주고 싶다. 게다가 나는 아직 젊다. KFC를 창업할 때 커넬 샌더스의 나이가 65세였다고 한다. 어느 신문 기사를 읽다 보니 70대에 사업을 시작한 사람도 있더라. 나는 새로운 사업을 하는 게 아니라 사업을 확장하는 것이다. (웃으며) 그러니까 샌더스보다 유리하다. 그리고 에이수는 사회 환원의 의미도 있다. 좋은 물을 함께 나누고 싶은 것이다.”

인터뷰가 3시간을 넘겼지만 이 회장의 목소리는 쩌렁쩌렁 울렸다. 잠시 물을 마시는 사이 회장실 밖에서 눈치를 보고 있던 입사 5개월차 신입사원이 결재서류를 들고 들어왔다. 그는 다음 날 트리니다드토바고로 출장을 간다고 했다. “그 친구 혼자 보내는 거다. 나는 방목(放牧) 경영을 한다. 얼마 전 신입사원이 들어왔는데 ‘종일 현장을 다니게 한 다음 리포트만 받아라’고 했다. 우리 회사는 선배가 먼저 가르치지 않는다. 스스로 일을 찾아서 해야 한다. 이래야 사람이 큰다. 하나하나 가르치면 중소기업은 ‘끝’이다. 후계자도 마찬가지다. 위에서 만드는 게 아니다. ‘내가 이런저런 이유로 경영을 하고 싶다’고 하는 사람이 있고, 그게 합당하다면 그에게 회사를 맡길 생각이다.”



이규철 회장은
1938년 전북 군산생. 군산고와 조선대 기계공학과(59학번)를 나왔다. 호남비료·석유공사·전엔지니어링에 근무하다 직장 동료의 권유로 77년 한국정수로 옮겼다. 나중에 이 회사 지분을 인수했다. “투전을 좋아했던 아버지가 집안 재산을 축내는 바람에 또래보다 2년 늦게 대학을 갔다. 덕분에 사업할 결심을 했고 일흔 넘어까지 일하고 있으니 나는 행운아”라고 말하는 낙관론자. 기술고시에 합격(70년)했으나 공기업인 유공에 남았다. 월급이 많다는 게 이유였다. 하지만 사장까지 승진하자니 너무 까마득해 사업에 뛰어들게 됐단다. 건설기계와 유체기계 기술사 자격도 갖고 있다. 가족으로 부인 이영일(65)씨, 딸 윤정(31·미국 뉴욕대 박사과정)씨가 있다.

안산=이상재 기자 sangjai@joongang.co.kr

중앙SUNDAY 구독신청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