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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론으로부터의 사법부 독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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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사법부를 가리키는 말 가운데에 이런 것이 있다. '가장 덜 위험한 기관'. 210여년 전 미국헌법 초안의 해설서라 할 수 있는 '연방주의자 논집'에서 알렉산더 해밀턴이 한 말이다. 그는 사법권 독립을 위한 방안의 하나로 법관 종신제를 옹호하면서 이렇게 얘기한다. "사법부는 그 기능에 비추어 헌법상 권리들을 침해할 위험이 가장 적다. 왜냐하면 그럴 능력이 가장 적기 때문이다. … 사법부는 칼이나 돈지갑에 대한 영향력이 없다." 말하자면 힘이 없으니 위험하지도 않다는 것이다. 나아가 그는 이렇게 말한다. "사법부 혼자 자유를 침해할 염려는 없지만 입법부나 행정부와 결합되면 매우 염려스러워진다."

*** '탄핵' 찬성 소수의견도 못 밝혀

근래 우리의 사법부를 둘러싼 이런저런 논란을 보면 사법권 독립의 문제가 이를테면 제3의 상황에 들어서고 있음을 감지하게 된다. 제1의 상황은 지난 권위주의 시대의 노골적인 재판 간섭이다. 1971년 사법파동 때 판사들이 공개한 당시의 실상 가운데 이런 사례가 보인다. '행정부에서 관심있는 사건의 검사는 자신의 명맥이 달려 있다는 말까지 하며, 판사에게 전화하거나 직접 찾아오는 등의 방법으로 적극적 또는 소극적으로 재판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87년 시민항쟁 이후 민주화 과정에 들어서면서 이제 우리 사법부는 더 이상 이 같은 원시적 상황에 있지는 않다.

그러나 그후에도 사법권 독립의 목소리는 그치지 않고 있다. 이 제2의 상황에서 주목되는 것은 사법권 독립의 핵심 요인이 사법부 밖이 아니라 안에 있다고 주장된다는 점이다. 드러내고 말하면 이런 얘기다. 개개 판사들은 좋은 보직과 승진을 원한다. 그 인사권은 대법원장이 쥐고 있다. 그러니 판사들은 대법원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고 그런 뜻에서 간접적으로 재판의 독립을 침해당하고 있다는 것이다.

좋은 자리, 높은 자리를 원하는 것이야 인지상정(人之常情)이 아닐 수 없고 그렇게 보면 이런 주장에는 분명 경청해야 할 점이 있다. 그렇지만 다른 한편으로 이를 그대로 받아들이기 꺼려지는 일면도 있는 것이 사실이다. 승진 때문에 소신껏 재판을 못한다면 과연 이런 자세가 정당화될 수 있겠느냐는 의문이다. 이 문제는 관료적 법원 조직의 근본에 관한 것이고 단시일 내에 쉽사리 무자르듯 해결되기는 어려운 것으로 보인다.

이 같은 제2의 상황이 지속되는 가운데 사법권 독립의 문제가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다. 지난 대통령 탄핵사건 때 헌법재판소의 경우를 돌이켜보자. 탄핵에 찬성하는 소수의견이 몇인지조차 밝히지 못하는 상황이다. 아직 역사가 짧은 재판소 자체를 지키기 위한 고육책으로 이해할 수 있겠지만, 얼마나 처연하기까지 한 모습인가. 최근의 대법관 임명을 둘러싼 일련의 사태도 마찬가지다. "시민단체의 의견이 법원에 영향력을 미치는 상황은 사법부의 심각한 위기"라며 고위 법관이 퇴임하고, 그 자리를 잇는 후임 법관은 "사법부의 독립과 권위를 훼손하는 세력으로부터 여러분을 보호하겠다"는 취임사를 내놓고 있다.

*** 퇴임 고위 법관들 쓴소리 잇따라

그런데 여론으로부터의 사법권 독립이라는 이 제3의 상황에서 언뜻 보아 간단치 않은 문제가 제기된다. 법관들의 반발에 대해 시민단체 쪽에서는 다시 이렇게 반박한다. "사법권 독립은 국민으로부터의 독립은 아니다." 말하자면 사법권 독립보다 국민주권이 앞선다는 논리다. 맞는 말이다. 누군들 사법권 독립이 국민주권에 앞선다고 말할 것인가. 그러나 주의할 것은 국민주권을 사법의 영역에서 어떻게 실현시키는가는 체제에 따라 다르다는 점이다. 우리의 경우 그 답은 헌법이 밝히고 있다. '법관은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그 양심에 따라 심판한다'(제103조).

국민주권의 원리를 사법에 대해 극단적으로 관철시키려다 보면 법의 지배는 희생될 수밖에 없다. 자유민주 체제는 그런 길을 선택하지 않는다. 법관의 독립은 법의 지배를 실현하기 위한 수단이며, 법의 지배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법관이 다수의 여론으로부터도 간섭받지 말아야 한다. 사법부가 시류에 흔들리면 매우 위험한 기관이 될 수 있다.

양 건 한양대 교수·헌법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