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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제개혁 아직 멀었다] 걸면 걸리는 아리송 소방점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민원인 : 사진이 있어야 한다구요? 왜요?

공무원 : 본인임을 확인해야 하거든요.

민원인 : 제가 본인인데요. 직접 오면 확인이 안되고 사진을 가져와야 확인이 된다는 겁니까?

공무원 : 규정이 그렇습니다. 주민등록증 말고 별도의 사진이 있어야 합니다. 참, 즉석사진은 안되고 6개월 이내에 찍은 사진관 사진이어야 됩니다.

지난해 10월 중순 인감도장 변경신청을 하러 서울개포동 동사무소를 찾은 박준철 (33.회사원) 씨는 동직원과 한참 승강이를 벌였다.

결국 사진을 가지러 집으로 돌아가야 했지만 朴씨는 아직도 그 이상한 확인법을 이해할 수 없다.

이 규정은 눈에 안 띄는 잔챙이여서인지 여전히 시행되고 있다.

이런저런 사소한 규제.규정 때문에 朴씨처럼 어처구니없는 일을 당하거나 더 큰 낭패를 본 사람이 숱하다.

하소연할 곳 없는 이들 입장에선 규제개혁이 먼나라 얘기로 들린다.

◇ 행정실수 떠넘기기 = 가정주부 박양금 (50.서울장안동) 씨는 지난달 20일 한차례 연체했던 자동차세금 고지서를 받았다.

납부기한일인 3월 31일 동대문구청에 돈을 내러 간 朴씨는 닷새전인 26일자로 자신의 자동차에 압류통지서가 발급됐음을 알게 됐다.

구청직원은 "서울시가 일괄처리했다" 며 朴씨가 자동차세를 한번 연체했기 때문에 일어난 전산착오인 것 같다고 덧붙였다.

어쨌든 세금만 내면 될 줄 알았던 朴씨는 "일단 압류조치가 된 이상 말소비용 (3천6백원) 을 내야 한다" 는 구청직원의 말에 아연실색했다.

전산실수를 왜 내가 책임져야 하냐고 따졌으나 "어쩔 수 없다" 는 대답이었다.

朴씨는 말소비용을 내지않고 버티고 있다.

◇ 점검인가, 수금인가 = 개인사업을 그만두고 지난달 서울 종로에서 노래방을 차린 박모 (50) 씨. 문 열기 직전에 점검을 나온 소방서 직원이 "검사과정이 2주일은 걸린다" 고 여러번 강조하는 것을 무심코 들어넘겼다.

그게 '뒷돈 요구' 였나 하는 생각이 든 것은 소방서원이 방염 (防炎) 시료를 채취한다면서 가로.세로 각 20㎝씩 내부시설 3곳을 뜯어갔을 때였다.

이런 검사를 왜 내장공사가 다 끝난 시점에 하는지 원망스러웠지만 아무소리 못하고 보수할 수밖에 없었다.

"소방서에서 트집을 잡자면 한도 끝도 없기 때문에 돈을 쥐어주지 않을 수 없습니다. " 경기도에서 아파트 건설업체를 운영하는 金모 (42) 씨의 말이다.

건물규모에 따라 수백만원에서 수천만원까지 '준공비' 를 건네지 않으면 준공을 얼마든지 늦출 수 있다는 것이다.

소방서에 국한된 얘기가 아니다.

◇ 전과 덮어씌우기 = 얼마전 8개월여 외국여행을 다녀온 강호균 (27.회사원.충남 서천군) 씨는 최근 향토예비군법 위반으로 벌금 30만원을 냈다.

6개월 이상 해외체류를 했을 경우 귀국후 15일 안에 예비군중대에 신고하도록 돼 있는 향군법 규정을 위반했다는 것이었다.

姜씨는 기가 막혔다.

병역법상 '국외여행후의 귀국신고 제도가 95년 12월 6일 이후 폐지돼 따로 신고를 할 필요가 없다' 는 답변을 대전지방병무청으로부터 출국 전에 들었기 때문이다.

병무청에 다시 문의했으나 "향군법은 우리 관할이 아니다" 는 무책임한 답변뿐이었다.

자신의 주변에만도 같은 사정으로 고발된 사람이 여럿이라고 姜씨는 전했다.

◇ 10m가 날린 1천만원 = 서울 동숭동에서 당구장을 해보려던 成모 (47) 씨는 아리송한 법규 때문에 1천만원을 날렸다.

입주예상 건물과 인근 초등학교 정문과의 거리는 2백50m가량. 이 정도면 학교로부터 50m, 2백m로 각각 정해진 절대정화구역.상대정화구역을 벗어나므로 문제없다고 판단, 임차보증금 1억원에 계약금 1천만원을 주고 계약을 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상대정화구역은 학교정문을 기준으로 거리를 산정하는 절대정화구역과 달리 학교 경계선 (담벼락) 을 기준으로 계산한다는 것이었다.

입주예정 건물은 학교정문에선 2백50m였지만 가장 가까운 학교담장과의 거리는 1백90m였던 것.成씨는 행정소송이라도 내볼까 하다가 돈만 날릴 것 같아 포기했다.

◇ 면허비용이 수천만원 = 요즘 조경 (造景) 업계에는 편법이 판을 친다.

예전엔 조경전문업체를 운영하려면 5만㎡이상의 수목재배용 토지를 소유해야 했다.

그러나 관계법령이 바뀌어 지난해부터 토지를 임대만 해도 면허를 받을 수 있게 됐다.

하지만 업자들의 불만은 여전하다.

나무를 기르는 사람과 사 쓰는 사람이 따로인지 오래고, 조경용 나무의 99% 이상이 시장에서 거래되는 판에 현행 규정은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결국 수목재배용 토지를 일단 임대해 면허를 받고는 바로 계약을 해지하는 편법이 쓰인다.

비용이 1천만~2천만원이나 들지만 어쩔 수 없다는 얘기다.

"현행 규정의 논리대로라면 건축면허도 레미콘 공장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만 줘야죠. " 조경업자 鄭모 (36) 씨의 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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