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의 가을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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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호 10면

점심때 추어탕 먹으러 교보문고 앞까지 갔다. 거기서 나는 어제 아내가 참 좋더라고 말해준 글귀를 본다. “대추가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 / 저 안에 태풍 몇 개 / 천둥 몇 개, 벼락 몇 개”

남편은 모른다

장석주 시인이 쓴 ‘대추 한 알’의 한 부분이라고 한다. 역시 시인이니까 태풍과 천둥과 벼락을 찾아내는구나. 서정주 시인도 그랬지 않은가. 가을 국화 앞에서 봄날 소쩍새 울음과 한여름 천둥소리를 듣지 않았던가. 시인의 감각은 예사롭지 않다.

시인은 아니지만 예사롭지 않기는 부인의 감각도 마찬가지다. 땀을 뻘뻘 흘리며 추어탕을 먹고 있는데 아내에게서 문자가 온다.

“오늘 하늘 봤어요?” “하늘?”
“초현실적이지 않아?”
“그런가? 그렇다고 하면 뭐 그렇게 볼 수도.”

시인도 부인도 아닌 남편이 보는 하늘은 현실적이다. 남편 눈에는 소쩍새도 천둥도 벼락도 보이지 않는다. 역시 남편의 감각은 예사로운 것이다. 나는 먹다 만 추어탕을 들여다본다. 추어탕 속에 미꾸라지가 들어 있다는 정도는 알겠군.

어떤 날은 하루 종일 바쁘고 고단하다. 그런 날 야근을 마치면 남편은 술이 고프다. 초현실적인 부인이 기다리겠지만 현실적인 남편은 술을 마신다. 가을이니까. 아무것도 없는 가을이니까.

가을에 마시는 술은 독하다. 하루 종일 고단하고 바빴던 남편은 금세 취한다. 집에 가면서 남편은 하늘을 본다. 밤하늘이 초현실적이다. 집이 서늘하다. 집 안의 모든 창문이 열려 있다. 아마 낮에 아내가 집 안에 초현실적인 하늘을 들여놓으려고, 가을 햇볕과 바람을 풀어 놓으려고 열어둔 것이리라. 거실에는 이불이 개켜져 있다. 아마 낮에 아내가 베란다에 내어 널었다가 거둔 것이리라. 옆에는 여름옷들이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다. 아내의 하루 종일도 고단하고 바빴으리라.

남편을 기다리던 아내는 이미 잠들었다. 아내의 머리맡에는 잠들기 전까지 읽었을 장석주의 시집이 놓여 있다. 고요한 아내의 숨을 따라 아내의 몸이 고요하게 오르락내리락한다. 아내의 호흡 위로 가을 바람이 지나간다. 잠시 아내의 새하얀 머리 밑이 살짝 보인다. 아내는 마른 기침을 한다.

남편은 창문을 닫는다. 그 소리에 아내가 깬다.
“언제 왔어?” “아까.”
“거짓말. 당신 술 많이 마셨구나.”
남편은 시인도 부인도 하지 못한다.
“아니, 뭐. 반주 삼아 삼겹살에 아주 조금.”
“거짓말.”

남편 보는 아내 눈빛이 꼭 시 한 구절 같다. 남편 얼굴이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소주 몇 개, 삼겹살 몇 개, 맥주 몇 개.


부부의 일상을 소재로 『대한민국 유부남헌장』과 『남편생태보고서』책을 썼다. 결혼정보회사 듀오에서 기획부장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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