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소보난민촌 가다]'고향땅 다시 밟을까'막막한 유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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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스코페 (마케도니아) =김석환 특파원]5일 저녁 (현지시간) 마케도니아 수도 스코페의 페트로베치 공항. 코소보에서 탈출한 알바니아계 난민들을 터키로 공수 (空輸) 하는 수대의 비행기가 굉음을 터뜨리며 잇따라 이륙했다.

첫 비행기 탑승자는 모두 1백51명. 대부분 부녀자와 어린이들이다.

갓난아기만 7명. 첫 비행기가 출발할 때 공항 한옆 버스 속에서 다음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난민들에게 다가갔다.

이륙하는 비행기를 바라보고 있는 이들의 표정은 한결같이 침통했다.

흙이 묻은 옷차림에 때가 꾀죄죄한 얼굴들이다.

너덧살쯤의 어린이를 품에 안은 30대의 한 남자는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다.

마치 넋이 나간 듯 무표정한 얼굴로 하염없이 창밖을 바라보는 10대 소녀. 왁자하는 소란과 함께 한 무리가 다음 비행기에 오르기 시작했다.

진흙이 덕지덕지 붙은 신발을 무겁게 끌며 트랩을 오르는 이들의 손엔 대부분 간단한 손가방이 전부. 상당수 어린이들은 그동안의 여정이 몹시 피로했던지 어머니 품에서 곤히 잠들어 깰 줄을 몰랐다.

이들은 이렇게 기약없는 유랑길을 떠났다.

이날 떠난 난민은 모두 6백명. 6일에는 5백명이 터키로 향했다.

인접국으로 떠날 난민은 모두 12만명. 독일 4만명, 미국.터키 각각 2만명, 노르웨이.캐나다.오스트리아 등이 각각 6천~5천명의 난민을 한시적으로 수용하겠다고 밝혔다.

살육과 추위.굶주림으로부터 멀어진다는 안도감이 있을 법한데도 발걸음은 한결같이 무거워 보였다.

고향땅에서 멀리 떨어지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 듯했다.

"나토가 빨리 지상군을 투입해 코소보를 해방시켜야 한다. 서방국가로 가는 것은 싫다" 고 난민수용소의 네르메딘 알리메하니 (42) 는 내뱉듯 말했다.

오히려 난민들의 관심은 헤어진 가족과 이웃의 안부다.

스켄더 주아레카는 "세르비아 보안군이 기관총으로 마을 사람을 난사하고 휘발유를 끼얹은 뒤 불을 질렀다.

공포의 탈출과정에서 가족과 헤어졌다" 며 수용소 내의 난민들을 상대로 하루종일 수소문에 나서고 있다.

천신만고 끝에 가족을 데리고 국경을 넘은 40대의 베리 레기고이는 가장의 체면도 잊고 엉엉 울며 자신을 집에서 쫓아낸 세르비아 경찰을 저주했다.

미국의 소리 (VOA) 방송은 국제적십자사의 협조를 얻어 난민의 명단을 하루 세차례씩 방송하고 있다.

단파로 발칸반도 남부 전역을 커버하는 이 방송에서는 난민의 이름과 출신지.현재 위치 등이 흘러나오고 있다.

난민들은 자신들이 환영받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목숨을 건 탈주 끝에 도착했지만 이들을 보는 마케도니아 정부부터 싸늘하다.

마케도니아는 블라체. 라두샤. 포리노.보야네 등지의 난민캠프 안의 구호활동도 통제하고 있어 마케도니아 적십자 외의 다른 국제구호기관이나 비정부기구 (NGO) 는 외각지원만을 맡고 있다.

블라체에서만도 하루 10명 이상이 탈진과 질병으로 사망하고 있지만 마케도니아는 난민들을 산속에 가둬놓고 도시 유입을 막고 있다.

그렇다고 서방이 난민을 따듯하게 감싸는 것도 아니다.

서방국가들도 내심 국내문제로 비화할 가능성이 큰 난민을, 비록 임시로라도 자국으로 이송하는 게 썩 내키지는 않는다.

나토의 마케도니아 주둔군 대변인 얀 유스텐은 "마케도니아로 넘어온 난민문제는 일단 마케도니아의 문제" 라고 선을 그으며 "나토와 유럽 국가들은 이를 인도적 차원에서 지원하고 있을 뿐" 이라고 말한다.

옛 유고연방 시절 외무장관을 지낸 티토 벨리손티는 "밀로셰비치.마케도니아.나토 모두가 난민을 전략적으로 이용하고 있다" 며 정치적 타협을 촉구했다.

그는 "최근 유럽의 지도자들이 역사를 잘 모르는 젊은 사람들도 바뀐 것이 문제를 더 악화시키고 있다" 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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