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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취재일기

대통령 직선제 목매던 ‘87년’에 머물 것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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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국회의원은 임기 내에 자신들의 세비를 인상할 수 없다.”

미국에서 가장 최근에 이뤄진 개헌의 내용이다. 기존의 헌법 조문 뒤에 1992년 달랑 이 문장만 추가했다. 1788년 채택된 미국 헌법은 지금까지 221년 동안 모두 27차례 개정됐다. 국가적으로 꼭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사안을 그때그때 ‘수정(Amendment)’하는 형식이었다. 우리 식으로 말하면 ‘원 포인트 개헌’의 연속인 셈이다. 노예제 폐지, 대통령 3선 금지, 여성 투표권 부여 등 미국의 역사를 바꾼 결정들이 모두 이런 방식으로 이뤄져 왔다.

미국이 오랜 세월 소규모로 안정적인 개헌을 이어올 수 있었던 건 ‘정당한 법의 절차(Due process of law)’를 강조하는 정치 문화가 뒷받침한 결과다. 대법원이 동일한 헌법 조항을 시대에 맞게 재해석해 헌법의 외연을 넓혀온 것도 큰 힘이 됐다.

물론 미국 개헌사에도 오점은 있다. 1919년 1월 술 제조·판매·운송을 금지한 ‘금주법’ 개헌(18차 수정)이 대표적이다. 이로 인해 집집마다 ‘한밤중에 몰래 술을 빚어 파는 밀주’(Moonshine) 풍조가 판쳤고, 알 카포네 같은 밀주업 폭력 조직이 기승을 부렸다. 결국 14년 뒤인 33년 금주법을 무효화하는 21차 개헌안이 통과됐다.

없던 조항을 만들었다가 도로 없앤 이런 경우를 감안하면 미국의 실제 개헌 횟수는 20여 차례라는 주장도 있다. 대략 11년 만에 한 번씩 개헌이 이뤄진 셈이다.

1948년 제정된 우리 헌법은 87년까지 39년 동안 아홉 차례, 약 4년에 한 번꼴로 개정됐다. 개헌의 대부분은 5·16, 12·12 등 군사정변의 결과이거나 3선 허용 등 대통령의 집권 연장을 위해 초법적으로 이뤄졌다. ‘개헌’ 하면 부정적 이미지가 먼저 연상되는 이유다. 헌법을 바꿔보자는 이명박 대통령의 제안이 정치권에서 탄력을 받지 못하는 건 이런 정서도 한몫하고 있다.

그러나 개헌은 김대중·노무현 정부 10년 내내 ‘국가 과제’로 추진해온 것이다. 김대중 대통령은 내각제 개헌을 대선 공약으로 내세웠고, 노무현 대통령은 대통령 연임제를 공개 제안했다.

지금도 여야가 바뀌었을 뿐이지 한나라당이든 민주당이든 개헌의 필요성 자체를 부정하는 목소리는 드물다. 노 대통령은 2007년 초 개헌을 제안하며 “대통령을 해보니 지금의 헌법 체제로는 누가 해도 제대로 국정을 운영하기가 어려운 구조”라고 하소연했다. 이 대통령이 말한 ‘근원적 처방’ 발언과 닮은 꼴이다.

정국 주도권이나 이해관계에서 벗어나면 질 좋은 개헌 논의는 얼마든지 가능하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대통령 직선제에만 목을 매던 때 만든 1987년의 헌법 체제에 피곤을 호소하는 국민 여론을 더 이상 외면하기 힘든 상황이 됐다는 점이다.

강찬호 정치부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