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5대 그룹 개혁약속 지켜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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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김대중 (金大中) 대통령이 5대그룹에 대해 개혁 고삐를 다시 죄기 시작했다.

그는 5대그룹의 구조조정이 계속 부진할 때에는 '정부가 직접 나설 것' 이라는 말도 서슴지 않았다.

정부쪽에서 이토록 강도높은 발언이 나온 것도 처음이다.

금융감독위원회가 연말까지 부채비율을 2백%로 낮추도록 못박고, 공정거래위원회는 구조조정에 소극적인 그룹에 대해 부당내부거래 조사에 착수하겠다며 5대그룹을 몰아붙이고 있다.

5대그룹과 정부간의 이같은 긴장관계는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얼마전만 해도 金대통령은 빅딜 등 재벌개혁이 지지부진하다는 비판에 대해 "재벌들도 노력중" 이라고 도리어 감싸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정부가 5대그룹을 다잡고 나선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최근 경제가 회생조짐을 보이면서 5대그룹이 구조조정에 소극적이라는 지적들이 적지 않았다.

핵심역량을 다지는 구조개혁은 지지부진하고, 빅딜은 답보상태며, 부채비율도 자산재평가로 눈가림식이 고작이었다.

금리가 떨어져 자산매각의 유인도 약해지고, 굴릴 데가 마땅찮은 시중자금이 5대그룹으로 몰리면서 자금과 경제력의 집중현상은 더욱 심화되는 양상을 보여왔다.

5대그룹 워크아웃 (기업개선작업) 선정도 기업.은행간 이해관계가 엇갈려 흐지부지되고, 이 때문에 5대그룹의 구조조정은 '물건너 가는 게 아니냐' 는 의구심마저 나도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구조조정은 선택의 문제가 아닌 생존의 문제다.

정부가 시키지 않더라도 기업 스스로 해야 한다.

물론 5대그룹들은 그동안 나름대로 뼈를 깎는 자구노력을 해왔다.

빅딜 등 구조조정에는 노조의 반발 등 장애요인이 적지 않고, 부채비율의 갑작스런 축소가 당장의 경쟁력을 약화시키는 등 현실적 고충 또한 만만치 않다.

하지만 정.재계간에 합의한 재무구조개선약정은 국민과의 약속이고, 더구나 외국 금융기관과 투자가들이 눈을 부라리고 이의 이행 여부를 주시하고 있지 않은가.

우리는 정부가 '직접 나서기' 전에 5대그룹이 스스로 구조조정에 박차를 가해주기를 바란다.

사실 정부가 직접 나선다 해도 지금 와서 5대그룹을 다그칠 수단은 신통치가 않다.

금리인하로 재벌들이 버틸 여유가 생긴 데다 은행들도 대부분 구조조정이 끝나 정부 말에 전처럼 호락호락하지 않다.

또 구조조정을 너무 다그치면 실업자가 급증해 선거에 큰 부담이 될 수도 있다.

이 때문에 6월까지만 버티면 구조조정을 모면하지 않겠느냐는 얄팍한 계산도 없지 않은 현실이다.

만의 하나라도 구조조정을 놓고 '게임' 을 벌일 생각은 버려야 한다.

중요한 것은 기업 스스로의 일관되고 강력한 개혁의지다.

경쟁력이 없고 불요불급한 계열사나 자산은 과감히 매각하고 적극적인 외자유치 등을 통해 재무구조를 개선시키는 것만이 진정 그룹을 살리고 국민과의 약속을 이행하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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