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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개항, 20세기 개방 이끈 166년 중국의 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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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으로 들어가는 관문이 상하이라면, 상하이의 관문은 바로 와이탄(外灘)이다. 상하이의 흥망성쇠를 대표하는 와이탄을 걷다 보면 전통과 현대, 중국적인 것과 서양적인 것이 오버랩된다. 황푸(黃浦)강을 사이에 두고 동쪽으로는 초고층 건물과 세계 유명 브랜드의 광고 간판들이 경쟁하듯 줄지어 서 있다. 서쪽에는 1872년 네오르네상스 양식으로 세워진 옛 영국 총영사관 건물부터 아르데코풍의 허핑(和平)호텔에 이르기까지 100여 년 역사의 고풍스러운 유럽풍 건물들이 도열해 있다. 화려함과 낭만, 그 자체다.

1843년 개항 전까지 상하이는 진흙 뻘이 넓게 펼쳐진 인구 10만 명의 작은 어촌에 불과 했다. 1291년에야 겨우 현(縣)이 설치됐다. 정치·경제·문화의 중심이던 쑤저우(蘇州)·우시(無錫)의 영향을 많이 받아 ‘작은 쑤저우’로 불렸다. 하지만 아편전쟁 뒤 맺은 난징조약에 따라 광저우·샤먼·푸저우·닝보·상하이 등 5개 통상항이 개방됐다. 굴곡 많은 역사를 시작한 상하이는 창장(長江)과 바다가 만나는 지리적 요건, 풍부한 생산력을 바탕으로 개항 30∼40년 만에 국제도시로 급부상해 ‘동양의 파리’라는 애칭을 얻었다.

외세의 강압으로 문을 열었지만 상하이는 서구 근대 문화를 재빨리 받아들여 옛것과 새것, 중국적인 것과 서양적인 것, 보수적인 것과 진보적인 것이 하나의 용광로에 뒤섞였다. 그 결과 문화적 개방과 혼종(混種)·융합의 색채를 띠는 특유의 문화적 정체성을 만들었다. 미국인 학자 로즈 머피는 『상하이-근대 중국의 열쇠』에서 “상하이에는 동서양 문화가 공존하고 있어 ‘양대 문화’가 포개져 있다. 양대 문화가 만나 충돌하고 융합하는 현상이 처음 나타났기 때문에 근대 중국은 상하이에서 태어났다”고 주장했다.

근대 문화의 중심에 섰던 상하이는 청 왕조의 통치권이 미치지 못하는 치외법권의 조계지가 많았다. 그 덕에 각종 신앙과 이념을 내건 정당과 단체가 모여 들었다. 새로운 학설·이론사조·관념을 제창하는 신문과 도서가 출판됐으며, 다양한 유파의 문학·미술·음악·연극 등이 번성했다. 귀족적이고 전통적이고 학술적이고 정치적인 색채가 강한 베이징의 징파이(京派)문화와는 정반대였다. 상하이에선 ‘통속적’ ‘오락적’ ‘대중적’ ‘실리적’ ‘모던함’ ‘식민지적’이라고 할 수 있는 하이파이(海派)문화가 등장했다. 상하이만의 독특한 상업정신과 시민문화가 형성됐다.

‘마력의 도시(魔都)’ ‘천의 얼굴을 가진 여인(千面女)’이라는 별명을 가진 상하이는 다른 지역 사람에게는 꿈의 도시였다. 지금도 중국 대도시마다 번화가에는 ‘상하이루(上海路)’라고 이름 붙여진 길이 많다. 상하이에 가 보지 못한 사람도 ‘난징루(상하이의 번화가)에서는 바람마저 달콤하다’고 말한다. 또 ‘우둔한 사람이라도 상하이에서 한번 살아 보면 현명하게 된다. 성실한 사람이라도 상하이에서 한번 살아보면 교활해진다. 못생긴 사람이라도 상하이에서 한번 살아보면 아름다워진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렇듯 상하이에서는 전통적인 사고와 오랜 습관들, 이질적인 문화들이 한데 뒤섞였다가 새로운 스타일로 탄생된다. 상하이 문화를 읽는 키워드는 개방성, 포용성, 혼종성이다. 이런 특성은 구체적으로 ‘양징빈(洋涇濱) 문화’와 ‘스쿠먼(石庫門) 가옥 양식’에서 찾아볼 수 있다.

양징빈은 원래 황푸강의 지류로 영국과 프랑스 조계의 구분선이었다. 1915년 복개공사를 거처 ‘아이둬야루(多亞路)’로 불렸다가 현재 ‘옌안동루(延安東路)’로 불린다. 지금은 사라진 작은 하천이지만 상하이의 100년 역사를 말하려면 여기에서 시작할 수밖에 없다. 양징빈은 당시 서양인이 많이 모이던 번화가여서 중국인과 서양인의 교류가 가장 활발했다.

이곳을 통해 외국의 물건들이 중국 각지로, 차·비단·도자기 같은 중국의 물건들이 해외로 팔려 나갔다. 이때 서양인들과 의사소통을 하기 위해 중국식 영어가 등장했다. 바로 영어 발음을 한자로 표기한 ‘양징빈 영어(pidgin english)’다. 이를테면 영어의 ‘yes’를 ‘也司’로, ‘no’를 ‘拿’로, ‘come’을 ‘康姆’로, ‘go’를 ‘谷’로 표기했다. 영어를 잘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억지로 만들어낸 혼합언어쯤으로 생각하면 된다.

상하이인 사이에서 양징빈 영어는 오랜 시간 부정적이고 부끄러운 일면으로 폄하돼 왔지만 상하이는 이를 통해 현대화된 대도시로 성장할 수 있었다. 양징빈 영어의 생성은 바로 외래문화와 소통하고 융합하는 과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상하이에서 양징빈은 중국과 서양, 전통과 현대를 구분하는 분수령이 되는 소통의 장이었다.

타이캉루(泰康路) 210룽(弄)에 위치한 톈쯔팡(田子坊)에 가면 예스럽고 단아한 느낌을 주는 작은 가게들, 노천 카페들과 잘 어우러져 옛 상하이의 정취를 물씬 풍기는 스쿠먼을 만날 수 있다. 스쿠먼은 중국과 서양의 장점을 잘 융합한 1920∼30년대 상하이의 독특한 주택 양식이다. 베이징에 쓰허위안(四合院)이 있다면 상하이에는 스쿠먼이 있다. 다세대주택과 비슷한 스쿠먼을 중심으로 주민들의 사교 공간인 ‘룽탕(弄堂)’이 형성된다. 이곳에서 사람들은 생활정보를 교환하고 돈벌이 정보를 주고받았다.

주택의 배열도 길을 따라 옆으로 늘어선 서양의 주택양식과 유사하다. 4면이 모두 벽으로 둘러쳐진 쓰허위안이 닫힘과 격식, 보수성을 나타내는 징파이 문화의 표상이라면, 스쿠먼은 하이파이 문화의 상징이다. 가옥 구조가 밖을 향해 열려 있는 데서 알 수 있듯 스쿠먼이 대표하는 상하이의 문화는 개방성이다. 이주문화와 서양식 생활양식이 들어오면서 점차 대가족 생활이 아닌 소가족, 홀로 이주해 온 사람들에게 걸맞은 문화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상하이에선 웅장한 만리장성이나 유구한 역사의 고궁 같은 유적을 찾아볼 수 없다. 하지만 19세기 고색창연한 조계지 건물에서 최첨단 자기부상열차에 이르기까지 과거·현재·미래의 모습이 공존하며 독특한 매력을 뿜어낸다. 상하이는 중국의 최첨단 도시이자, 모든 중국인이 가 보고 싶어하는 꿈의 도시다. 19세기에는 파리가 세계 제1의 도시였고, 20세기에는 뉴욕이 그러했다. 중국에선 21세기 세계 제1의 도시가 상하이일 것이라고 말하곤 한다. 치욕의 역사를 극복한 상하이는 코스모폴리터니즘(세계시민주의)에 기반한 새로운 도시문화의 만개를 꿈꾸고 있다.

김정은 한국디지털대학 교수·실용외국어학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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