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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영화판, 징하요(12)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8면

(12) '짝코'의 수모

앞에서 언급했듯이 좌우 이데올로기의 대립은 내 유소년기를 송두리채 망가뜨리고 말았다.

이런 암울한 기억은 살아가면서 내 삶의 굴레이자 해원 (解寃) 의 표적이기도 했다.

나에겐 영화란 좋은 '무기' 가 있었다.

이데올로기의 앙금을 영화를 통해 풀어내는 방법을 곰곰히 생각했다.

과연 이데올로기란 무엇인가.

오랜 고민 끝에 내가 다다른 결론은 '사람 (人)' 이었다.

같은 하늘을 이고 사는 우리가 공생 (共生) 하는 유일무이한 방법은 '사람이 근본이 되는 세상' 을 만드는 것이었다.

우리는 일찍이 그 인본주의를 숭상하는 민족이었다.

그런 민족이 이념의 노예간 된 원인을 나는 세계 열강 (列强) 들의 세력다툼 때문이었다고 이해했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한국전쟁도 결국은 그 열강들의 대리전에 다름 아니란 생각에 이르렀다.

나는 개인적이든 국가적이든 이데올로기의 이같은 상흔 (傷痕) 을 내 영화속에 담지 않으면 안된다는 의무감 같은 것을 갖기 시작했다.

그런 관심과 의욕이 가장 고조된 때가 70년대 말이었다.

그런 고민을 영화 '짝코' (삼영필름 제작)가 일정부분 해결해 주었다.

결과적으로 검열로 인해 온전치 못한 반쪽짜리 영화가 되고말았지만, 나는 이 작품을 통해 이데올로기에 대한 나의 확고한 인본주의 관점을 처음으로 시험할 수 있었다.

80년 나온 '짝코' 는 송길한 각본으로 30년동안 쫓고 쫓기는 사람의 기묘한 인간관계를 엮은 작품이다.

송씨와는 이 작품이 인연이 돼 이후 '만다라' (82년) '티켓' (86년) '씨받이' (86년) 등을 함께 만들었다.

나는 이 영화에서 '짝코' (짝짝이코) 란 별명으로 악명높은 빨치산 백공산 (김희라) 과 '빨갱이 잡는 귀신' 송기열 경사 (최윤석) 둘을 좌우 이데올로기의 희생자로 내세웠다.

6.25 전쟁말기 천신만고끝에 송경사는 짝코를 잡지만, 호송 도중 그의 꾀에 넘어가 놓치고 만다.

이때부터 한창 잘나가던 송경사는 겉잡을 수 없이 추락하기 시작한다.

상부는 짝코에게 뇌물을 받았다는 혐의로 경찰제복을 벗게하고, 그 충격으로 아내마저 화병으로 세상을 뜬다.

쫓고쫓기던 30년 원한. 인생말년에 둘은 한 행려병자 수용소에서 재회하지만 짝코는 시치미를 뗀 채 송경사를 외면한다.

이때 서로의 감춰진 전력 (前歷) 때문에 어색했던 두 사람을 자각시키는 한 '사건' 이 일어난다.

TV에서 방영되는 한국전쟁에 대한 세로운 해석. 그것은 열강의 대리전이었다는 시각이었다.

둘은 수용소를 도망쳐 고향길을 동행한다.

당시 검열의 잣대는 이 TV장면에 집중됐다.

시나리오 검열에서 무사히 통과돼 영화를 만들었는데도 영화 실사 검열에선 "안된다" 고 완강했다.

결국 이 영화는 잘 만들어 놓고도 이런 검열 때문에 '병신' 이 되고 말았다.

두 인물을 통해 좌우 양쪽의 화해와 용서를 그리려 했던 나의 첫 인본주의의 실험은 이런식으로 빗나갔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이 영화는 대종상에서 '반공영화상' 을 수상했다.

'짝코' 는 80년대 중반 젊은 평론가들에 의해 재발견돼 그나마 나는 위안을 받았다.

나는 당시 군부독재시절이란 시대상황을 고려해 반쪽짜리에 만족해야 했지만, 기분은 영 씁쓸했다.

내가 다시 이데올로기에 대한 인본주의의 철학을 내 영화의 화두로 삼기까지는 그로부터 13년이 걸렸다.

93년말 '서편제' 의 신드롬이 점차 잦아들 무렵, 나는 그 두번째 실험에 들어갔다.

조정래 원작의 '태백산맥' 이 나에게 용기를 주었다.

글=임권택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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