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기고

신중해야 할 징벌적 손해배상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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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5면

미국 오리건주 대법원은 최근 담배회사에 대해 장기간의 흡연으로 폐암에 걸려 숨진 흡연자의 유가족에게 각각 7950만 달러(약 1000억원) 및 1380만 달러(약 172억원)를 배상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그러나 1954년 미국 세인트루이스에서 흡연소송이 시작된 이래 현재까지 제기된 4000여 건의 개별소송에서 원고의 최종 승소가 확정되어 금전적 배상으로 연결된 사례는 겨우 7건에 불과하다. 흡연소송에서 원고의 승소는 미국에서도 매우 이례적이다.

우리나라에서는 2007년 흡연소송에서 원고 패소 판결이 나왔다. 법원은 담배를 결함 있는 제조물이라고 볼 수 없고, 담배에 포함된 니코틴에 의존성이 있더라도 금연을 불가능하게 할 정도로 보기는 어려우며, 흡연과 폐암 발병 사이의 역학적 관련성만으로는 흡연자들의 폐암과 흡연 사이의 개별적 인과관계를 입증할 수 없다고 보았다.

미국의 흡연소송에서 천문학적인 금액의 배상판결이 선고되는 것은 미국 특유의 법제도와 문화에 기인한다. 먼저, 미국에서는 고의로 불법행위를 한 가해자에게 실제 손해를 넘는 배상을 명할 수 있는 징벌적 손해배상제도가 인정된다. 징벌적 손해배상액은 손해배상을 청구한 흡연자 자신은 물론 모든 흡연자의 잠재적인 질병발생 가능성과 비흡연자의 건강상 위해까지 고려해 산정된다. 이런 미국식 손해배상 산정방식을 우리나라에 적용한다면 손해 발생에 대한 자기책임의 원칙과 헌법상 과잉금지의 원칙에 반할 가능성이 있다.

사실 미국에서도 이번 판결에 징벌적 배상원리의 적용을 두고 상당한 갈등이 있었다. 미국 연방대법원은 오리건주의 항소법원과 대법원의 판결을 두 번씩이나 파기환송하면서 “소송을 제기하지 않은 다른 피해자들에 대한 손해까지 감안하여 징벌적 손해배상액을 결정한 판결은 헌법적인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미 연방대법원은 또 징벌적 배상제도가 미국 수정헌법 제5조와 제14조에 규정된 적법절차원리(due process of law)에 위반될 가능성이 있음을 지적했다. 오리건주 법원이 소송 당사자가 아닌 제3자의 피해까지 고려하여 피고에게 징벌적 손해배상 책임을 묻는 것은 피고의 소송상 방어의 기회를 박탈함으로써 적법절차를 거치지 않고 피고의 재산권을 침해하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이다.

재판의 결론이 철저한 증거나 법이론보다는 배심원들 개인적 감정이나 편견에 좌우될 가능성이 큰 미국의 배심원 제도와, 흡연으로 인한 피해를 사회적 책임으로 인식하는 미국사회의 특성 역시 흡연소송에서 원고 승소판결에 영향을 줄 수 있다.

그러나 한국·독일·프랑스·일본 등 전문법관에 의하여 심리되고 증거재판주의를 중시하는 대륙법계 국가에서는 미국식 징벌적 손해배상제도를 그대로 수용하기 어렵다. 무엇보다 이에 대한 국민적인 공감대조차 형성되지 않은 가운데 미국식 징벌적 손해배상제의 도입을 거론하는 것은 무리다.

김성수 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