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분수대

깜빡이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5면

1970년 10월. 병사한 나세르에 이어 이집트 대통령이 된 사다트가 차를 타고 교차로에 들어서려 한다.

"어느 쪽으로 갈까요?"(기사)

"나세르는 어느 쪽으로 갔나?"(사다트)

"왼쪽요."

"그럼 왼쪽 깜빡이를 켜고 오른쪽으로 가게."

실제 있었던 이야기는 아니다. 당시 서방 언론들이 사다트의 조심스러운 정책전환을 예상하며 지어낸 풍자였다. 그 후 깜빡이는 정책의 전환을 암시하는 표현으로 사용되곤 했다. 사다트는 집권 초 나세르 추종세력의 견제를 받았다. 이를 의식한 그는 겉으론 나세르 노선을 강조했다. 왼쪽 깜빡이는 '나세르와 같은 길을 갈 테니 안심하라'는 정치전술을 표현한 것이다.

그러다 71년 5월 정적들을 쿠데타 혐의로 체포한 뒤 사다트는 독자노선을 걷기 시작했다. 특히 경제에서 나세르와 반대로 나아갔다. 나세르는 사회주의식 계획경제를 표방했으나 사다트는 대외개방을 추진했다. 또 나세르가 분배를 중시한 데 비해 사다트는 성장을 택했다. 막상 교차로에 접어들자 깜빡이를 무시하고 핸들을 반대로 꺾은 셈이다.

결과가 좋지는 않았다. 외채가 늘고 인플레가 심해지는 등 혼란이 커졌다. 식량 부족이 겹쳐 폭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개방과 성장이라는 방향은 잘 잡았으나 운전이 서툴러 일을 그르친 것이다.

이처럼 정책의 전환은 단순히 지도자의 마음먹기에 달린 문제가 아니다. 무엇보다 지지세력의 반발을 살 수 있다. 반대파에 국정의 주도권을 빼앗길 염려도 있다. 또 실패하면 고립무원의 신세가 된다.

이 때문에 권력기반의 흔들림 없이 정책전환을 꾀하는 데는 고도의 정치력이 필요하다. 사다트의 깜빡이도 그런 의미에서 나온 비유일 것이다. 또 전문적인 정책 수행능력도 있어야 한다. 이를 갖추지 못한 정책전환은 위험한 도박이다.

국내에선 지난주 발표된 금리인하를 정책의 전환으로 보는 시각이 많다. 나중에 어찌 될지 모르지만 일단 부양과 성장 쪽으로 깜빡이를 켠 것은 분명해 보인다. 워낙 어렵다고 하니 '우리도 경제에 신경 쓰고 있다'는 신호를 준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핸들의 방향이 실제 어디로 꺾일지는 더 두고 봐야 하지 않을까. 깜빡이는 깜빡이일 뿐이다.

남윤호 정책기획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