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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바른말'을 찾아 나서세요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정권이란 말할 것도 없이 공공지물 (公共之物) 이다.

문명사회치고 이 진리가 통하지 않는 데는 없지만 한편으론 이것만큼 빛을 발하기 힘든 진리도 드물다.

역대에 변화.개혁을 표방한 정권이 적지 않았지만 더 나은 사회를 위한 새 틀은커녕 지난날의 작은 잘못을 바로잡는 일조차 제대로 못해낸 까닭도 이와 관련있다.

국가 운영과 국정 책임자의 의지가 특정당파나 세력의 이해에 따르게 되면 정권은 사물화 (私物化) 되고 만다.

교체없는 정권은 사물화되기 쉽다.

헌정 사상 최초로 선거를 통한 여야 정권 교체에 성공한 김대중 (金大中) 정부의 출범에 그토록 많은 의미를 부여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새로운 정치질서 수립과 사회 변화의 기대를 안고 새정부가 일을 시작한 지 1년이 지났다.

사회 변화속도가 워낙 빠르고 기질이 급한 국민이기에 지켜보는 입장에서는 길다면 길었다.

반면 일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짧다면 짧은 기간이었을 것이다.

1년 전 취임식장에 들어서는 金대통령을 나는 다음과 같이 묘사했던 기억이 난다.

많은 것이 변하리라는 인상을 주는 정치인, 서민의 지지를 가장 많이 받은 정치인, 재벌을 포함해 기득권에게 진 빚이 별로 없는 정치인, 국민과 격의없는 대화를 약속한 정치인, 북한과 함께 사는 길을 찾는 정치인, 외교 역량이 강한 정치인, 문화에 대한 소양과 감수성을 지닌 정치인, 여성에게도 배울 점이 많다고 말하는 정치인.

1년전을 돌이켜 보면 이런 모습의 '준비된 대통령' 앞에는 사회 변화에 동참해 개혁의 단기적 고통을 감내할 많은 '준비된 국민' 이 있었다.

지구촌 전체를 보더라도 세기말 전환점에서 우리 모두가 더 사려깊고 더 개방적인 자세로 세계를 보고 자신을 바꾸지 않으면 안된다는 변화욕구도 일던 터였다.

변화가 일어났어야 할 핵심부문은 크게 세가지 혁신과제와 세가지 제도정비로 요약된다.

정부.정치.재벌혁신이 전자에 속하고 사회보장.인사.부패방지 제도의 정비가 후자에 속한다.

이 부문들에 실제로 얼마나 많은 변화가 일어났으며 또 일어날 조짐이 보이는가.

후퇴했다거나 제자리 걸음이라고까지 말하고 싶지는 않지만 숱한 의문이 떠오르는 것은 사실이다.

국력의 기반인 정부경쟁력을 위해 한쪽에서 그토록 공을 들이는 데도 정부가 일하는 방식은 결국 달라지지 않을 것인가.

정적 (政敵) 을 바보 아니면 범죄자로 취급하는 정치풍토, 비민주적인 정당구조를 그대로 두고 정당명부제도를 도입해도 될 것인가.

구조조정이라는 것이 부자들이 진 빚을 가난한 서민들이 나누어 갚고, 10대 재벌이 5대 재벌로 비대편성되는 식일 수 있는가.

조세부담률은 선진국을 능가하면서도 국민복지기본선의 설정없이 복지의 이름으로 여전히 최저임금이나 최저생계개념에 머물러야 하나. 국민대화합의 미명으로 부정부패로 처벌된 자, 지역패권을 탐한 자, 금권정치를 일삼은 자가 대통령 주변에, 그리고 고위공직에 다시 돌아오는 행태는 언제까지 반복될 것인가.

떡값으로 새는 돈이 경제를 침몰시키고 국민 화합을 깨는데도 돈 안드는 부패방지 장치는 왜 미루는가.

막 태어난 정권은 필히 사람과 세 (勢) 를 모아야 하기 때문에 이래저래 혐의를 받기 쉽다.

국민의 눈에 국가운영이 대통령 주변의 돌출한 몇몇 사람의 손아귀에서 우물쭈물하는 것처럼 비치고 공직이 특정 당파나 계층의 이익을 도모하는 수단처럼 여겨지면 개혁은 듣기조차 혐오스러운 구호가 되고 만다.

金대통령 임기 2년차는 총선과 맞물려 있다.

선거제도 국가에서 대통령과 정치출신 각료들이 정권 재창출에 신경쓰는 것은 당연하다.

도처에 유혹이 있을 것이다.

선거철이 되면 金대통령은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사람이 될 것이다.

그때 가서 주변에서 바른 말 할 사람을 찾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다.

혹세무민의 죄명으로 처형된 소크라테스는 마지막 법정에서 자신을 변호하면서 자기가 일생을 이웃과 국가를 위해 바른 말만 하고 살아온 증거로 두가지를 들었다.

첫째는 평생 가난하게 살았다는 것이고, 둘째는 버젓한 공직을 맡은 적이 없다는 것이었다.

재물을 모아 자신과 가족을 챙기지 않고 가진 것이 없기에 오로지 바른 말을 하기에 적합했다는 것이다.

만약 공직을 맡았더라면 바른 말을 하면서 어찌 공직과 목숨을 보전할 수 있었겠느냐는 것이었다.

이제부터 金대통령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아마 바른 말을 찾아 나서는 게 아닌가 싶다.

박은정 이화여대교수.법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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