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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인 지도가 바뀐다] 1. 성공회대파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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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지식인 파워의 시대다.

그만큼 지식인 사회의 변화도 심하다.

여기저기 새로운 그룹들이 생겨나고 학풍에서도 다양화 바람이 불고 있다.

시대 정신과 에너지의 공급원인 지식인 동네의 변화상을 매주 한장의 지도로 그려 소개한다.

경인국도를 따라 인천 쪽으로 가다보면 서울이 끝나는 구로구 항동의 길 왼편에 아담한 학교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일제때 성미가엘신학원으로 출발해 지금은 4년제 대학이 된 성공회대학교다.

여기, 듬성듬성 자리잡은 소박한 건물 안에는 지금 우리 나라 담론 (談論) 계의 '프런티어' 라 불릴 만한 일군의 비판적 지식인들이 포진해 있다.

굳이 이름을 달자면 '성공회대파 (派)' 라고나 할까. 결코 '주류' 는 아닌, '비주류' 지식인들이 하나둘씩 모여들어 이제는 한국 지식인사회의 무시못할 세를 형성하고 있다.

성공회대파 교수들은 이들의 정점에 이 땅의 대표적 진보지식인 신영복 (申榮福.58) 교수를 올리는 데 이견이 없다.

잘 알려졌듯이 68년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아 20년 20일간 옥살이를 했던 그가 새로운 담론계를 일궈가고 있는 젊은 지식인들의 '정신적인 지주' 로 떠오른 것은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지난 89년 성공회 신부인 이재정 (李在禎.55) 총장이 가석방으로 풀려난 申씨를 시간강사로 초빙한 것은 진보지식인이 설 땅이 거의 없었던 대학 사회에서는 하나의 사건이었다.

그후 요즘 담론계의 '맹장' 으로 활약중인 조희연 (曺喜.43) 교수와 김동춘 (金東椿.40) 교수 등이 연이어 가세하면서 성공회대는 일시에 세간의 주목을 받게 된다.

복권이 안돼 시간강사이던 申교수는 지난 해 5월에야 부교수로 정식 임용됐으나 아직 담론의 현장에는 뛰어들지 않고 있다.

대학에서 정치경제학.한국사상사.동양철학 등을 강의하며 틈나는 대로 서예 동아리 '서도반' 을 지도하는게 그의 일상이다.

또 '더불어 숲' (중앙M&B) '나무야 나무야' (돌베개) 등 사색 깊은 수상집을 내기도 한다.

그러나 申교수의 지식인관은 단호하다.

그만큼 성공회대에 모여든 후학들에게 미치는 영향이 소리없이 크다.

"전망도 남보다 먼저 하고, 좌절도 남보다 먼저 하고, 반성도 남보다 먼저 하는 이른바 지식인의 선진성은 지식인의 치부라 생각된다.

먼저 하는 전망이 관념적이지 않기 위해서, 먼저 하는 좌절이 도피가 아니기 위해서, 먼저 하는 반성이 자기변명이 아니기 위해서 지식인은 최후까지 실천과 연대하여야 한다" 고 강조한다.

성공회대파 지식인들은 한결같이 기존의 이해관계나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려는, 자칭 '아웃사이더' 들이라는 점이다.

이들은 학문적 방법론에 있어서도 고식적인 것을 싫어한다.

늘 진보적.개혁적 의식 속에서 구체적인 대안을 찾아내려는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

참여연대 산파역을 했고 현재도 정책위원장으로 있으며 80년대 이른바 '사회구성체 논쟁' 에서 한국자본의 성격규정을 포함한 변혁론 논쟁을 주도했던 조희연 교수는 최근 'IMF체제' 라는 국가적 위기상황에 대한 지식인들의 책임과 '국민정부' 하의 재벌 문제, 시민운동 등에 관해 활발한 논쟁을 주도하고 있다.

그는 지난 해 출간한 '한국의 민주주의와 사회운동' (당대)에서 "IMF체제는 우리 사회의 주류담론이 비판담론을 적극적으로 수용, 자기 쇄신을 이뤄내지 못한 데서 연유한다" 고 지적했다.

曺교수와 함께 참여연대에서 활동 중인 김동춘 교수는 도발적인 비평으로 유명한 강준만 (康俊晩.43) 교수 (전북대 신방과)가 '인물과 사상' 에서 격찬할 만큼 체계적인 논리를 갖춘 신진 논객이다.

그밖에 몇 안되는 한국의 마르크스 연구자 김진업 (金鎭業.42) 교수와 비판적 정보사회학의 이종구 (李鍾久.46) 교수, 인종문제나 외국인 노동자 문제에 정통한 박경태 (朴俓泰.38) 교수 등이 비판사회학 그룹을 형성하고 있다.

문화 분야에서는 70년대 후반부터 문화.음악 운동에 참여해온 대표적인 문화비평가 김창남 (金昌南.39) 교수가 대표적인 인물. 노래 동아리 '메아리' 와 '노찾사 (노래를 찾는 사람들)' 의 창립멤버였으며 만화평론가협회 회장이기도 한 그는 문화비평적 관점에서 사회 개혁을 추구하는 지식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새 학기에는 95년에 '와우!!' (박영률출판사) 라는 문명비평서를 출간해 화제를 모았던 문명비평가 김용호 (金容浩.42) 씨가 이 대학 비판언론학 진영에 가담했다.

성공회대의 뿌리격인 신학 쪽은 손규태 (孫奎泰.59) 교수를 필두로 민청학련 사건으로 구속된 바 있는 권진관 (權鎭琯.47) 교수, 여성신학자 최영실 (崔永實.50) 교수 등 민중신학자들이 자리잡고 있다.

사회복지 분야에는 이론과 참여를 병행하는 실천 중심의 지식인들이 참여하고 있다.

정원오 (鄭源午.34) 교수는 서울역 노숙자상담소 소장을 맡고 있으며 여성 노인문제 연구자 이가옥 (李佳玉.49) 교수는 한국보건사회연구원 노인복지정책실장을 맡기도 했다.

YMCA간사 출신으로 참여연대가 발행하는 '월간복지동향' 편집장인 이영환 (李榮煥.42) 교수와 서울대 사회복지학과에서 장애인 문제로 처음 박사학위를 받은 김용득 (金用得.33) 교수 등도 적극적 사회복지론을 펼친다.

민주화 운동이 가속화된 70년대 중반 이후 80년대 중반, 한국사회에는 새로운 지식인들이 대거 출현했으며 이들이 어느새 지식인 사회의 중추 세력을 이루었다.

조희연.김동춘.김창남 교수 등은 이러한 흐름 속에서 진보적 성향 때문에 소외된 인물이었으나 성공회대와 인연을 맺은 후 탄탄한 이론과 실천력을 발휘하며 주류에 도전하고 있다.

성공회대는 한 사람의 지도자보다 더불어 살 줄 아는 열 사람을 기르는 것을 모토로 삼고 있다.

이재정 총장은 자신이 기꺼이 '비주류' 지식인들에게 교육을 맡긴 것은 "그들이 학문적 업적뿐 아니라 소외된 계층과 함께 가려는 '더불어 정신' 이 있기 때문" 이라고 말한다.

과거 제도권 밖에서 소신있는 비판의 목소리를 높여왔던 이들 지식인들은 이제 대학이란 제도권 안에서 야심만만한 과제에 도전하고 있다.

바로 대안 (代案) 교육이다.

이들은 상업주의 경쟁사회에서 이길 수 있는 방법 만을 가르치는 기존교육에 반기를 든다.

시민운동의 이론과 방법론을 다루는 비정부기구 (NGO) 학과 설립, 인권강좌 개설, 사회봉사의 전공필수화, 복지정책 수립을 위한 관학 (官學) 협동 등 다양하고 의미있는 교육적 도전을 전개하고 있다.

그리고 머지않아 시대의 큰 흐름으로 다가올 지식인 사회의 '주류' 를 꿈꾸고 있다.

김국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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