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死者에 대한 사면·복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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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김대중 대통령 취임 1주년과 3.1절을 맞아 정부에서 사면.복권을 검토 중인 사람들 가운데 두 사람의 고인 (故人) 이 들어 있다. 문익환 (文益煥) 과 최능진 (崔能鎭) .문익환은 민주투사이자 통일운동가로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최능진이란 인물을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1899년 평남 강서에서 태어난 최능진은 미국에 유학, 듀크대에서 체육학을 전공했다. 졸업후 YMCA에서 일하던 중 안창호 (安昌浩) 를 만나 흥사단에 가입했다. 1929년 귀국해 숭실전문학교 체육교수로 근무했고, 37년 흥사단 계열 동우회 사건에 연루돼 2년 동안 옥고 (獄苦) 를 치렀다.

해방 직후 최능진은 조선건국준비위원회 (建準) 평남지부 치안부장직을 맡았다. 그러나 좌익의 탄압을 견디다 못해 그해 9월 월남했다. 서울에서 최능진은 미군정청에 들어가 경찰관 강습소장이 됐다.

그후 경무국이 창설되자 수사과장, 46년 봄 경무국이 경무부로 승격하자 수사국장이 됐다. 당시 경무부장 조병옥 (趙炳玉) 과는 흥사단 활동을 통해 잘 아는 사이였다.

그러나 경찰 내 친일파 처리 문제를 놓고 대립했다. 46년 10월 대구폭동이 일어나자 조병옥은 좌익의 선동이라고 발표했다. 그러나 현지에 내려가 사건을 조사하고 돌아온 최능진은 친일파 경찰에 대한 양민들의 불만이 한 요인이라고 지적했다. 이에 조병옥은 최능진을 파면했다.

그후 최능진은 친일파를 비호하는 이승만 (李承晩) 의 집권을 저지하는 데 앞장섰다. 하지 미군사령관 고문이던 서재필 (徐載弼) 을 옹립하려던 계획이 실패하자 자신이 직접 나섰다. 48년 5.10 선거에서 이승만이 출마한 서울 동대문에서 출마하려 했으나 우익단체의 집요한 방해로 좌절됐다.

그해 10월 최능진은 '혁명의용군 사건' 으로 체포됐다. 국방경비대를 동원해 쿠데타를 기도했다는 죄목이었다. 여순 (麗順) 반란 사건이 일어나자 이에 대한 혐의까지 추가됐다. 5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 중 6.25를 만나 풀려났다.

최능진은 임정 (臨政) 계와 손잡고 '즉시 정전.평화통일 운동' 을 벌였으나 성과없이 끝났다. 9.28 수복 후 합동수사본부에 체포돼 이듬해 2월 11일 경북 달성에서 총살형이 집행됐다.

현행법상 사자 (死者) 는 사면.복권 대상이 아니다. 하지만 고인은 죽은 자의 법정인 역사의 법정에서 이미 오래 전 사면.복권됐다. 이제 남은 일은 산 자의 법정이 이를 확인함으로써 원혼 (寃魂) 을 달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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