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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인터뷰]데뷔40주년 공연갖는 국민가수 패티 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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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국내 가수로는 처음으로 데뷔 40주년 기념공연을 펼치는 가수 패티 김 (26~27일 서울 세종문화회관.02 - 2237 - 9565) .그녀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 두 가지는 '대형' 과 '서구적' 이라는 것이다.

59년 데뷔한 그녀는 작달막한 트로트 가수가 대종인 당시에 훌쩍 큰 키 (1백68㎝)에다 폭발적인 창법, 화려한 스테이지 매너로 무대를 장악했다.

한국 여가수에게서 노래만큼 '육체' 도 부각된 것은 그녀가 처음일 것이다.

뚜렷한 이목구비, 강렬한 눈매는 당시 한국 남자들이 감당하기엔 무리일 만큼 서구적인 에로티시즘을 발산했다.

서양풍 노래가락과 고급스런 발성도 다른 가수들과는 확연히 달랐다.

묘한 것은 이런 서양풍 가락을 한국적으로 소화해내는 특유의 번역력이 그녀에게 있었다는 것. 소설가 이병주씨는 "그녀 성대 속엔 서양가락을 우리의 '한 (恨)' 으로 물들이는 특수장치가 있는 것 같다" 고 감탄한 적이 있다.

[만난사람=강찬호 기자]

- 가수로서 당신의 위치는 참으로 특이하다. 트로트가 전부이던 60년대 가요계에 서구적인 가락과 발성으로 히트곡을 양산한 유일한 가수였다.

"당시 식자층이나 음악을 깊이 듣는 매니어들이 들을만한 가요가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서양풍 멜로디를 높은 음역으로 소화하는 가수가 나오니까 열광한 것 같다. 고급스런 팬이 많았다는 점은 가수로서 자부심을 갖는 부분이다. 음악에서 내가 가장 중시하는 것은 역시 좋은 선율과 리릭 (가사) 이다.

그점에서 내 음악은 '스탠더드 팝' 이란 표현이 가장 어울릴 것 같다. "

- 대단히 돌출적인 서구형 가수였는데 그런 음악을 할 수 있었던 원천은 무엇인가.

"아무래도 유전적 요소가 큰 것 같다. 신문업을 하셨던 아버지는 시조를 잘 하셨고 목소리가 고와 '꾀꼬리' 별명을 지녔던 어머니, 오빠.언니들이 모두 음악광이었다. 집안에 LP가 6백장, 도너츠판이 1천장이나 됐다. 매일 오페라 아리아, 프랭크 시내트라.패티 페이지.페리 코모 등의 팝을 들으며 살았다.

그 노래들은 음악을 넘어 내 몸의 일부로 느껴진다. "

- 그러나 당신의 음악에는 국악, 특히 창의 영향이 느껴진다는 분석도 있다.

"한국전쟁 당시 피난갔던 대구에서 여성 국극단 공연을 보고 창의 맛을 알게 됐다. 너무 좋아서 국악 공연은 모두 찾아다니며 창을 따라불렀다. 경기 민요처럼 경쾌한 것도 좋지만 한이 서린 남도창이 가장 좋았다. 중앙여중 시절 가족 몰래 전국국악 경연대회에 나가 1등을 하기도 했다. 뒤늦게 이를 안 아버지가 '기생이 될 거냐' 고 야단쳐 중단했지만 그 시절 배운 창은 내 음악의 중요한 밑거름이다. "

- 서구적인 것과 한국적인 것의 조화는 '가요 세계화' 의 한가지 해법을 40년 전 제시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내 노래에 세계적 요소가 있다는 데 동감한다. 그러나 한창 시절인 60년대에 한국을 전혀 알지 못하는 미국에서 내 노래가 알려지는 데는 한계가 컸다. "

- 40년 동안 음반만 70장, 곡수로는 6백곡을 발표했다. 자신의 대표곡으로 생각하는 노래는.

"굳이 들자면 '가을을 남기고 간 사랑' 이다. 최근 곡중에선 '누가' 가 애착이 간다. 91년 박춘석 선생이 지은 곡인데 너무나 마음에 들어 타이틀곡으로 밀려했지만 박선생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공연에선 꼭 이 노래를 불러 병상에 계신 박선생께 들려드리고 싶다. " (박춘석씨는 뇌졸중으로 쓰러져 5년째 투병 중이다)

- 70년대 국민가요처럼 불렸던 '서울의 찬가' 같은 곡은 어떤가.

"그 곡을 취입하던 70년 당시, 노래를 들은 김현옥 서울시장이 '이건 서울시민 전체의 노래야' 하면서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한 일화가 있다. 개인적으로는 '가을을…' 만큼 좋아하는 곡은 아니다. 그러나 이 노래를 부를 때는 '내가 한국사람이구나' 하는 자부심을 갖게 된다. "

- '패티' 란 이름은 어떻게 지은 것인가.

"데뷔 당시 국내 가수들은 미군 무대가 주 활동공간이었다. 예명도 당연히 미국식이 관행이었다. '베니 김쇼' 로 데뷔하면서 쇼단장 부인이 '린다 김' 이란 예명을 지어줬는데 나는 그 이름이 이상하게 싫었다. 그래서 알고 있던 영화배우 리타 헤이워드나 수잔 헤이워드를 본따 리타 김, 또 수잔 김 이렇게 붙여봤는데 역시 어울리지 않았다. 그러다가 좋아하는 가수 패티 페이지의 이름을 따 붙여보니까 바로 이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

- 70년대에 박정희 대통령이 가수들 이름을 전부 우리말로 바꾸라 해서 고역을 치른 걸로 아는데.

"맞다. TV쇼에 출연하면 브라운관 자막에 김혜자 (본명) 로 소개돼 참으로 불쾌했다. 어떻게 가수의 자기 표현을 그런 식으로 가로막는지 이해가 안됐다. 그래서 무대에 오르면 꼭 '패티 김입니다' 고 자신을 소개하곤 했다. "

- 거기에서 드러나듯 한국의 가요 현실에 대해 할 말이 많은 것으로 안다.

"내가 가장 싫어하는 말이 '딴따라' 다. 가수 본인들조차 그렇게 자조하곤 한다. 가수는 예술인이고,가요는 당당한 문화로 대접받아야 하는데 어떻게 그런 말을 쓸 수 있나. 그런 편견을 없애기 위해 늘 무대에 설 때면 최상의 완벽한 내용을 꾸미려고 노력해 왔다. "

- 그런 완벽주의 때문에 술.담배를 일절 않고 무대에 오르기 전 항상 양치질을 한다고 들었다.

"결벽증이라는 얘기를 들을 정도로 디테일한 부분까지 신경을 쓴다.

한 방송사에서 특별쇼 리허설을 할 때인데, 오케스트라 연주자 한분이 검은 양복에 흰 양말 차림인 게 눈에 띄었다. PD한테 부탁해 리허설을 중단하고 사람을 시켜 검은 양말을 사와 그분에게 드렸다. "

- 흐트러짐 없는 몸매도 완벽한 무대를 위해 관리한 결과인 것 같다.

비결이 따로 있나.

"하루에 꼭 5~6㎞씩 걷는 것이다. 매일 아침 동생과 함께 '비밀장소' 를 찾아 한두시간씩 걷는다. 그냥 걷는 게 아니고 경보 스타일로 뛰듯 걸으며 호흡을 조절한다. 그러면서 하루를 구상한다. 이 시간은 내게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가장 소중한 시간이다. "

- 40주년 공연 레퍼토리는 어떻게 꾸미나.

"히트곡을 다 부르려면 4시간은 족히 걸릴 거다. 초청가수 조영남.인순이도 있어 나 자신은 한 25곡쯤 부를 것 같다. 특히 이번엔 내 딸 카밀라 (22.UCLA3년) 도 나온다. 음악 전공으로 교내 아카펠라 그룹을 이끄는 등 노래 소질이 많다. 핵심 곡들은 아무래도 내 음악의 전부라고 할 수 있는 길옥윤.박춘석 두 작곡가의 곡들이 될 거다. "

- 길옥윤씨와 박춘석씨를 비교한다면.

"두 분 성격과 음악이 일치하는 것 같다. 길선생의 음악은 다정다감한 스타일이고 박선생 음악은 이지적이고 냉정한 매력이 있다. 아무래도 한때 부부였기에 길선생의 곡에 애정이 깊다. "

- 첫 남편이기도 했던 길옥윤씨가 세상을 떠난지도 어언 4년이다.

그에 대한 소회가 남다를 것 같다.

"아직도 이혼하면 남남으로 결별하고 살아야 하는 것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많지만 나는 이혼 후에도 그분을 좋은 스승이자 친구로 생각했다. "

- 가요사적으로 기념비적인 40주년 공연이 끝나면 팬들은 50주년 공연도 원할 것 같다.

"30주년 공연을 할 때만 해도 나는 자신감이 넘쳤다. 그러나 지금은 좀 더 신중하고 차분한 마음가짐으로 일을 진행하고 있다. 50주년 공연도 여건만 허락된다면 하고 싶다. 그러나 인간의 일은 모르지 않는가. 나이도 있고. 그래서 한국가수로는 처음인 이 40주년 공연에 모든 열정을 바쳐 임할 생각이다.

"

[패티 김은…]

▶본명 : 김혜자 (金惠子) ▶40년 서울생 ▶출신교 : 서울중앙여중고

▶주요경력 : 59년 데뷔, 60년 일본 방송진출, 63년 미국 진출, 67년 한국 최초 뮤지컬 '살짜기 옵서예' 공연, 74년 도쿄 국제가요제 3위 ( '사랑은 영원히' ) 입상, 78년 가수로는 최초의 세종문화회관 공연, 85년 가수로는 최초의 오케스트라 (서울시향) 협연, 89년 동양가수로는 최초의 카네기 콘서트홀 공연 및 30주년 기념공연, 95년 화관문화훈장 받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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