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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먹 아닌 시간으로 다스리겠다” ‘자유’ 앞세운 장면의 통치 철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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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1면

오늘은 제2공화국 국무총리 장면(張勉·1899~1966) 탄신 110주년이다. 또한 1962년 8월 29일은 그가 ‘반혁명음모혐의’로 법정 구속된 날이기도 하다. 자택에 칩거하던 64년 7월, 9년 전 그를 저격했던 이가 속죄와 보은의 편지를 보내왔다. “인간에게 가장 귀하다는 생명마저 빼앗겼던 저희들에게는 의외의 4·19가 일어나자 그해 10월 1일 관대하신 은총으로 생명이 부활되었고, 그해 12월 친히 오셔서 주신 따뜻한 털내의로 몸을 녹여가며 살아온 불초소인은 하루라도 그 은총을 잊을 수는 없습니다.” 그의 인간 됨됨이의 넓이와 깊이는 자신을 암살하려 한 이들에게 보인 관용과 사랑에서 빛을 발한다. 2공화국 총리 시절 교도소로 저격범들을 찾아 악수를 나누는 사진은 보는 이의 가슴에 잔잔한 감동을 준다.

“네 학과에 대하여는 무엇이고 충분히 배워 가지고 돌아오너라. 현대 미국 최신 건축술도 배우고 특히 한국 실정에 맞는 건축을 전공할 것이니, 현재로서는 공장, 오피스 빌딩, 학교 건물 등이 긴급 요청된다. 미국에 체류하고 있는 동안 어떤 건물이고 보통으로 심상히 보지 말고 언제나 건축 기술자의 안목으로 모든 면을 세부까지 연구·관찰하여라. 금년 여름방학에는 어느 건축가 사무실에서 조수 노릇 하여 배워가며 학비도 버는 것이 좋을 듯하다. 나는 언제나 너희들이 고명한 학자나 부자나 고귀한 자 되기를 바라지 않고 오직 겸손하고 건실한 주의 사랑을 받는 자 되기만 기원할 따름이다.”

조기유학이 유행처럼 번지는 오늘. 전쟁의 포화 속 부산 피란 시절 미국에서 건축학을 배우던 셋째 아들 건에게 보낸 편지의 구절구절은 어버이 된 이에게 자식의 앞길을 어떻게 인도하고 조언해야 할지를 곰곰이 생각하게 한다.

“국민이 열망하던 자유를 한 번 주어보자는 것이 민주당 정부의 이념이었다. 우리는 철권으로 억압하는 대신 시간으로 다스리고자 했다. 귀와 입으로 배운 자유를 몸으로 배우게 하려는 의도였다. 이론과 학설로 배운 자유는 혼란을 일으키지만, 경험으로 체득한 자유는 진정한 민주주의의 초석이 되며, 자유가 베푼 혼란과 부작용에 스스로 혐오를 느낄 때 진실한 자유를 얻는 것이다.” 그가 2공화국 총리 시절 맛 보여준 자유와 자율에 기반을 둔 시민사회의 경험은, 민주화를 꿈꾸던 시절 그 운동이 지속될 수 있게 해준 희망의 기억이었다.

허동현(경희대 학부대학장·한국근현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