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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로 노는 1억2000만 명 시장…글로벌 대박 상품도 안 통해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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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선데이, 디시전메이커를 위한 신문"

난공불락의 일본 시장에서 성공 기미가 보이는 ‘메이드 인 코리아’ 상품들이 하나둘 나오고 있다. 철저한 현지화를 택한 시승차 마케팅으로 신뢰감을 쌓고 있는 현대차 버스와 LG전자 휴대전화가 대표적이다. 일본에서 ‘국민 여동생’으로 통하는 영화 배우 아오이 유우가 LG전자 휴대전화 광고 포스터에서 조만간 현지에 출시될 신제품 ‘L-04A’을 들고 활짝 웃고 있다.(사진 오른쪽) 일본에서 판매 중인 현대차 ‘유니버스’. 먼발치에 후지산이 보인다.(사진 왼쪽) [현대자동차, LG전자 제공]

‘세계 메모리반도체 시장 55% 점유’ ‘미국 휴대전화 시장 절반 접수’ ‘세계 자동차 시장에서 포드를 제치고 4위 등극’.

글로벌 경제위기가 남의 이야기인 양 승승장구하는 한국 기업의 승전보들이다. 이처럼 막강 코리아 기업 군단에도 밝히고 싶지 않은 게 있다. 미국·유럽연합(EU)과 더불어 세계 3대 시장으로 꼽히는 일본 시장 공략 성적표다. 일본 소비자들은 욘사마·동방신기엔 열광하면서도 정작 ‘메이드 인 코리아’ 제품엔 냉랭하기만 하다. 세계 시장에서 인기몰이 중인 한국산 자동차, 첨단 가전제품조차 찬밥 신세를 면치 못한다. ‘언제까지 일본 열도에선 라면과 소주·김·막걸리·김치만 팔아야 하느냐’는 수출업계의 자조 어린 탄식도 깊어지고 있다. 이에 반해 국내 기업의 일본 부품·소재 의존증은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다. 한국은행은 1999∼2008년 10년간 대일 경상수지 적자액이 200조원에 이른다고 최근 밝혔다. ‘한류(韓流) 후광’이나 ‘환율 효과’도 잘 먹혀들지 않는 일본 시장. 이곳에 한국산 제품 붐을 일으키는 일은 불가능한 걸까. 일본 시장 공략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세일즈맨과 대일 통상 전문가들은 “엔고 피로감이 큰 현지 상황을 잘 활용해 새로운 상륙 작전을 펼쳐야 할 시점”이라고 입을 모은다.

국내 간판 대기업도 고전

현대자동차는 요즘 일본에서 ‘페라리보다 유명한 자동차 회사’라는 소리를 자주 듣는다. 뼈 있는 농담이다. 올해 7월 현지 판매량이 고작 13대에 그쳤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다. 페라리는 대당 가격이 5억∼6억원대인 세계 최고 럭셔리카. 그런데도 7월 일본 판매량이 76대로 현대차의 다섯 배를 넘었다. 현대차 측은 “일본 시장은 주요 공략 지역이 아니어서 별 신경 안 쓴다”고 한다. 하지만 겉으로는 의연해도 일본 시장 이야기만 나오면 속이 까맣게 탄다. 현지 시장 공략에 무지 많은 공을 들였지만 좀처럼 돌파구를 찾지 못해서다. 2005년엔 일본에서 한류 붐을 폭발시킨 탤런트 배용준까지 투입해 대대적인 프로모션을 펼쳤지만 결국 100억원 넘는 광고비만 날렸다.

조두섭(경영학) 요코하마국립대 교수는 “현대차의 글로벌 위상을 감안하면 한 해 일본에서 적어도 5만∼6만 대를 파는 게 정상”이라고 말했다. 조 교수는 현대차의 패착으로 두 가지를 꼽았다. 무엇보다 비좁은 도로와 주차 시설 탓에 작은 차를 선호하는 일본 소비자의 트렌드를 읽지 못했다는 것이다. 여기에 세계 최고의 경쟁력을 가진 일본 중형급 승용차 시장을 너무 만만히 본 것도 치명적 실수라고 덧붙였다.

휴대전화와 LCD TV로 지구촌 시장을 매료시키고 있는 삼성전자 역시 일본 시장에서만큼은 ‘전략적 철수’를 택했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일본 가전 유통망이 워낙 복잡하고 폐쇄적인 데다 소니 등 일본 가전업체에 연간 1조1000억 엔 규모의 메모리반도체와 LCD 패널 등을 납품하는 특수 관계를 고려해 시장에서 발을 뺐다”고 말했다.

실제로 삼성전자는 2004년 TV를 마지막으로 일본 가전 시장에서 사실상 손을 털었다. 일본 이동통신업체에 일부 휴대전화 모델을 납품하고 있지만 글로벌 전체 매출을 감안하면 무시해도 좋을 규모다. 삼성은 언제 다시 일본 가전 시장에 뛰어들지 계획을 잡지 못한 상태다.

‘명품 집착증’ 강한 점 고려해야

상황이 이렇다 보니 대일 무역수지 적자는 갈수록 늘어만 가고 있다. 대일 무역수지 적자의 원인은 기술 격차다. 계측기나 플라스틱 금형 등 몇몇 제품을 제외한 한국산 부품·소재는 품질과 디테일에서 100년 아성의 ‘메이드 인 재팬’에 여전히 뒤져 현해탄을 못 건너고 있다. 일각에선 한국산이 냉대를 받는 데는 무섭게 추격해 오는 한국 기업에 대한 일종의 라이벌 의식이나 견제 심리가 깔려 있다는 말도 나온다. 하지만 일본 현지 무역통들은 이런 이유들만으로 일본에서의 한국 상품 판매 부진을 명쾌하게 설명하기 힘들다고 지적한다. 유리벽처럼 잘 드러나진 않지만 치명적일 수 있는 비무역 장애물들을 꼼꼼히 짚어 볼 시점이라는 것이다.

삼성 일본 현지법인인 삼성재팬의 문대철 상무는 “일본에선 갈수록 ‘갈라파고스 현상’이 심각해지고 있다”고 전했다.

갈라파고스섬은 진화론 창시자인 찰스 다윈에 의해 세계적으로 알려진 곳이다. 남미 에콰도르에서 900㎞ 떨어져 있는 이 섬은 오랜 세월 대륙과 격리된 바람에 생물들이 독자적으로 진화를 해왔다. 이처럼 세계 주류와는 따로 노는 현상이 바로 일본 시장에서도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일본은 인구가 1억2000여만 명에 달하고 구매력도 세계 최고 수준이다. 이 때문에 일본 업계엔 국내 소비자만 잘 잡아도 충분히 살아남을 수 있다는 심리가 깔려 있다.

문 상무는 “일본의 휴대전화 및 가전 메이커들이 글로벌 시장보다 자국 시장을 겨냥해 특화된 제품을 내놓다 보니 다른 나라 제품이 끼어들 틈이 없다”고 말했다. 실제로 휴대전화만 해도 일본에선 여전히 폴더형이 인기다. 세계 소비자들이 바·슬라이드 스타일을 선호하는 것과는 사뭇 다른 취향이다. 유난히 깔끔한 것을 좋아하는 일본인들은 휴대전화 액정 화면이 밖으로 노출돼 흠집이 생기기 쉬운 슬라이드형을 꺼린다는 것이다. 냉장고도 마찬가지. 글로벌 스탠더드는 양문형 스타일인 데 반해 일본에선 소비자의 까다로운 입맛을 맞추느라 6도어 모델까지 나온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설령 미국·유럽 등에서 대박을 터뜨린 한국산 제품이라도 그대로 들고 뛰어들었다간 큰코 다치기 십상이다.

유별난 갈라파고스 현상을 놓고 일본 내의 우려도 커지고 있다. 일본 기업의 글로벌 경쟁력을 깎아내리는 요인이 되고 있어서다. 삼성경제연구소는 “일본 휴대전화 업계의 경우 국내 시장에 안주한 나머지 국제 표준 경쟁에서 뒤처지고 소비자 트렌드도 놓친 상황”이라고 분석했다. 1997년만 해도 22%에 달하던 일본 휴대전화의 세계 시장 점유율은 이제 6% 밑으로 쪼그라들었다.

한국 못지않은 일본 소비자들의 ‘명품 집착증’ 도 눈여겨봐야 할 대목이다. 일본 자동차 시장에 진출한 외국 업체 중 유독 독일 메이커들만 휘파람을 불고 있다. 7월만 해도 일본에서 폴크스바겐은 3083대, BMW는 2019대, 메르세데스 벤츠는 1964대를 각각 팔았다.

한국무역협회 아주팀 김은영 부장은 “일본에서도 가격 탄력성이 높은 식품이나 소비재는 이미 중국·동남아산이 잠식했지만, 자동차 같은 고가 내구소비재는 유럽산 브랜드가 아니면 눈길조차 주지 않는 게 일본 소비자들”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일본 시장에서 한국 제품은 대부분 고급 내구소비재(유럽산)와 저가 생필품(중국·동남아산) 중간에 어정쩡하게 끼어 있는 ‘샌드위치 브랜드’ 취급을 받고 있는 게 현실이다.

박부규 무협 도쿄지부장은 “제2차 세계대전 패전 이후 미국 군정이 미쓰비시 등 일본 재벌을 해체했지만 상당수 일본의 대기업은 많은 하청업체의 지분을 소유하면서 하청업체와 마치 계열사 같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런 밀착 관계로 인해 엔고로 하청업체의 가격 경쟁력이 떨어져도 쉽사리 내치지 못한다는 분석이다. 한국 수출업체들의 조급증도 자충수가 되고 있다. KOTRA 김일 오사카센터장은 “대다수 일본 업체는 거래를 트고 싶은 납품업체를 상대로 1, 2년가량 소규모 거래를 하면서 뜸을 들이는 전통이 있다”며 “‘성격 급한’ 한국 기업이 이를 못 견뎌 하고 먼저 손을 드는 경우가 적지 않다”고 지적했다.

“인내심 갖고 신뢰 쌓아 가야”

일본 수출 시장에서 날아오는 소식이 하나같이 우울한 것만은 아니다. LG전자는 올해 일본 내 휴대전화 판매 목표량을 지난해보다 세 배나 많은 150만 대로 잡았다. 일본 소비자의 취향과 심리를 현미경처럼 분석한 뒤에 선보인 일본 시장 전용 휴대전화 모델들이 현지에서 주목받는 덕이다. 초콜릿폰 등 글로벌 히트 제품을 들고 가긴 했지만 부품은 물론 디자인도 크게 손보는 등 철저한 현지화를 꾀했다. LG전자 일본법인의 김동건 마케팅 담당은 “일본 소비자들이 문자보다 e-메일 기능을 즐겨 쓰기 때문에 액정화면을 글로벌 표준인 3인치에서 3.2인치로 더 키우고 손톱을 기르는 일본 여성이 많은 점을 감안해 터치 패드를 정전식에서 감압식으로 바꾸는 등 완전히 다른 제품을 선보이고 있다”고 말했다.

올해 초 ‘유니버스’ 모델로 일본 고급 버스 시장에 뛰어든 현대차는 10대의 시승용 버스를 일본 전역에서 돌리고 있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현지 고속버스업계가 직접 품질과 내구성을 테스트해 보도록 하기 위해서다. 현대차 상용차 판매 담당 이종덕 차장은 “컵 홀더 모양까지 따지는 일본 구매선을 위해 다양한 옵션이 가능하도록 생산 라인을 새로 정렬하고 현지 업체와 정비 서비스 계약도 맺었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엔고 현상이 고착화하면서 일본 제조업체들이 바이블처럼 지켜온 ‘일본 내 현지 조달 원칙’이 조금씩 허물어지는 모습이 나타나는 것은 긍정적 신호라고 말한다.

조두섭 교수는 “일본에선 완성차보다 승용차 부품 모듈 시장 진출을 본격 검토하는 게 훨씬 현실성 있다”고 조언했다. KOTRA 신환섭 도쿄센터장도 “일본 산업계에선 최근 치솟는 물류비 절감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다”며 “경남·부산 지역 부품·소재 기업들은 거리상으로 일본 업체에 불리하지 않은 점을 집중 홍보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일본에서 BB크림 판매 붐을 일으킨 한스킨의 이주희 마케팅 팀장은 “포장지 문구 하나하나까지 따지는 까다로운 일본 소비자들을 공략하려면 일본 시장 상황과 고객 취향을 꿰뚫고 있는 현지 전문 수업·판매 업체와 손을 잡는 것도 방법”이라고 말했다.

표재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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