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문화유산답사기]22.북한의 현대미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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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이제까지 북한 답사기를 쓰면서 나는 문화유산과 자연을 통해 다소는 의도적으로 남북한의 민족적 동질성을 찾으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이제부터 내가 이야기하려는 현대미술의 경우는 차라리 그 이질성 (異質性) 을 명백히 드러내놓는 것이 현명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1988년 7월 7일, 노태우 (盧泰愚) 대통령이 발표한 대북화해 제의, 이른바 7.7선언 이후 각 분야에서 북한 바로알기 운동이 일어났다.

이때 나 역시 현역 미술평론가로서 '계간미술' 의 긴급특집 '분단 이후 북한미술을 말한다' 라는 좌담에도 참석하고 (1988년 가을호, 통권 47호) 나중에는 을유문화사에서 간행한 '북한의 인식' (전12권, 1990) 시리즈 중 '북한의 예술' 에서 '북한 현대미술의 사적 (史的) 전개와 그 이해' 라는 긴 논문을 기고하기도 했다.

이때 나는 북한의 현대미술은 우리와 너무도 달라서 어느 화가의 어느 작품이 어떤 화풍으로 그려졌다 라는 사실보다도 하나의 작품이 생산 (창조) 돼 소비 (감상) 되는 소통과정을 이해하는 것이 더욱 중요함을 알았다.

북한에서는 미술인이 개별적 존재로 독립한다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

모든 예술가와 마찬가지로 미술인은 전문인이며 전문인으로서 인민에게 근로.봉사하는 것이 임무로 돼 있다.

그래서 모든 미술가는 '조선미술가동맹' 의 회원으로 등록돼 거기서 월급받고 일정량의 작품을 제작, 제출하거나 산업현장에 파견돼 그곳의 미술관계 일에 종사하도록 돼 있다.

현장에 나가 있는 '해방 작가' 건 직장으로 출근하는 '문예총 작가' 건 이들은 월급을 받으면서 8시간 동안 창작에 전념 (근무) 하고 저녁 2시간 정도 학습 또는 총화 (토론) 를 한 다음 퇴근하며 자기의 창작실태를 수시로 중간 보고하고 평가받아야 한다.

어느 경우도 개인의 생각과 사상을 자유롭게 미술로 표현한다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

그러니까 북한의 현대미술에서 어느 작가의 개성을 찾는다는 것은 애시당초 의미가 없는 셈이다.

이미 소재도 주어져 있고 그것을 예술적으로 승화시킬 주제도 정해져 있으니 남은 것은 기법의 문제뿐인데 그것도 추상작업과 전통회화의 관념적 표현은 허용되지 않으므로 그 폭은 좁을 수밖에 없다.

이것이 북한의 현대미술은 왜 그처럼 단조로울까에 대한 대답이다.

또 북한에는 당연히 화랑이 없다.

오직 해마다 열리는 국가미술전, 2년마다 열리는 산업미술전, 선전화 (宣傳畵) 전, 기념 속사화 (速寫畵 ; 스케치) 전, 출판화전 등에 출품해 자기 기량을 평가받게 된다.

그리고 우리식의 개인전은 있을 수 없다.

그런데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남한의 국립현대미술관에 해당하는 미술관이 북한엔 없다는 점이었다.

좀처럼 믿어지지 않는 점인데 북한에 와서 보니 진짜로 현대미술관이 따로 존재하지 않았다.

그 대신 평양의 조선미술박물관이 그 기능을 맡고 있었다.

조선미술박물관은 모두 26개의 전시실로 구성돼 있다.

2층의 제1호실에서 12호실까지는 고대에서 근대미술까지 진열돼 있고, 3층의 제13호실에서 26호실까지는 해방 후 오늘에 이르는 미술품이 전시돼 있었다.

그러니까 아트뮤지엄이로되 전통과 현대를 분리하지 않은 것이었다.

현대미술관이 독립돼 있지 않다는 것은 얼핏 생각하기에 그만큼 비중이 약하다는 뜻이 된다.

그러나 북한 사람들의 생각은 좀 달랐다.

과거 (전통) 는 현재 (현대) 를 이해하는 과정이므로 분리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일리있는 주장이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현대라는 시대개념이 남.북한에서 얼마나 다른가를 엿보게 된다.

우리에게 현대라는 시간은 '불확정한 과거' 다.

현대라는 문명.문화가 어느 방향으로 튀어나갈지 예측하지 못한 상황에서 저마다의 희망과 생각을 말한다.

그것을 미술로 나타내는 것이 미술가의 일이다.

그러나 북한에서 현대란 '확정된 미래' 일 뿐이다.

역사적 단계로서 시대개념을 정해놓고 오직 그 길로 가는 것이 곧 삶이고 문화창조다.

일찌감치 성격과 개념이 규정돼 있는 것이다.

북한의 가장 권위있고 가장 공식적이며 조선시대로 치자면 '실록' 에 해당할 '조선전사' (전33권)에서 현대미술에 대한 평가를 보면 1945년부터 1989년까지를 전후복구시기 (53~56).사회주의기초 건설시기 (57~59).천리마시기 (60~70) 등 7개의 시기로 나누어 놓고는 각 시기의 대표작을 열거하면서 거기에 확고부동한 평가를 내리고 있다.

그렇게 빨리 모든 것을 정리하고 지나갈 만큼 그들은 일사불란하고 단선적이다.

조선미술박물관의 현대미술 전시실은 바로 그런 작품들을 진열하고 있었다.

김용준 (金瑢俊) 의 '승무' (1957) , 정현웅 (鄭玄雄) 의 '남연군묘 도굴' (1957) , 정종여 (鄭鍾汝) 의 '오월의 농촌' (1956) 등 월북화가들의 작품도 있고, 김의관의 '남강마을의 여성들' (1966).정영만의 '강선 (降仙) 의 저녁노을' (1973) 같은 현대 조선화 (朝鮮畵) 의 대표작도 있고, 유화 김민구의 '백두산 천지' (1970) , 조각 노준기의 '어린 광부' 1966) 등도 있다.

북한의 현대미술에 관한 도록이나 화보에 나오는 작품들이 거의 다 여기에 전시돼 있다.

그러니까 북한에서 미술관이란 현대미술의 명작이 탄생되는 곳이 아니라 현대미술의 명작이 들어와 걸리는 곳이었다.

북한의 현대미술에서 우리와 크게 다른 또 하나의 중요한 사항은 공공 기념미술품에 대한 생각이다.

남한에선 작가의 역량은 철저하게 개인전을 통한, 미술관 내지 전시장에서의 활동에 국한시켜 생각한다.

공공조각.기념조각.초상화.기록화 따위는 본격적인 예술이 아닌 것으로 취급한다.

그런 것은 일종의 '돈벌이' 를 위한 작품 수주일 뿐 거기에 예술혼을 담을 생각을 좀처럼 하지 않는다.

지난 시절 그렇게 많은 초상조각과 민족기록화가 제작됐건만 그것을 자신의 이력서에 당당히 내세우는 작가를 나는 아직 보지 못했다.

그런 식으로 우리 대중은 전문가들에게 농락당하고 있다.

이 점에서 북한은 그 사정이 정반대로 된다.

오히려 개성을 죽이는 집체창작이야말로 그들은 각 역사적 시기의 중요한 예술적 업적인 것이다.

그들은 개인의 성과보다도 집단이 앞서는 '인명 (人名) 없는 미술사' 를 지향한다.

이를 테면 '천리마 동상' (1961) , '만수대 대기념비' (1979) , '평양지하철도 벽화' (1978) , '가극 피바다 무대미술' (1971) , '김일성경기장 벽화' (1982) 를 빼놓고는 북한의 현대미술을 논할 수 없는 것으로 돼 있다.

남과 북의 현대미술은 이처럼 미술의 제도와 관행과 소통 구조 자체에 큰 차이를 보이고 있었다.

글 = 유홍준 (영남대 교수.박물관장) 사진 = 김형수 (통일문화연구소 차장)

*다음회는 '조선화의 제한된 성공' 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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