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떠나간 '타향살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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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우리 가요사에서 1930년대는 황금기였다.

당시 가요는 주로 축음기를 통해 보급됐는데, 30년대 중반 우리나라 축음기 보유대수는 35만대를 넘었다.

이에 따라 음반판매가 활기를 띠어 5만장 이상 10만장까지 팔리는 히트곡이 출현했다.

30년대 최고의 인기가요는 '타향살이' 였다.

1932년 콜럼비아레코드 주최 전국 신인가수 선발대회에서 3위로 입상한 고복수가 34년 데뷔곡으로 부른 '타향살이' 는 발매 1개월만에 5만장이 팔리는 폭발적 인기를 누렸다.

작곡가는 손목인으로 '타향살이' 는 그로서도 처녀작이었다.

손목인은 이듬해 또 다른 히트곡 '목포의 눈물' 을 발표했다.

'목포의 눈물' 은 오케레코드가 조선일보와 함께 공모한 6대 도시 애향가 (愛鄕歌) 가사로 당선한 것을 손목인이 곡을 붙이고 목포 출신 이난영이 노래를 불렀다.

이난영은 '목포의 눈물' 의 성공으로 '가요의 여왕' 이란 칭호를 얻었다.

손목인은 1913년 진주에서 태어났다.

서울 중동학교 시절 농구선수였던 그는 YMCA에 드나들다 음악을 접했다.

손목인은 음악가가 될 결심으로 1930년 일본 유학을 떠났다.

여름방학중 서울에 돌아온 손목인을 발견한 사람이 흥행의 귀재 (鬼才) 인 오케레코드의 이철이었다.

이철은 손목인에게 '타향살이' 와 '목포의 눈물' 을 작곡하도록 했던 것이다.

그후 손목인은 일본 고등음악학교에 정식으로 입학해 작곡과 편곡을 배우는 한편 당시 일본에서 유행한 스윙 재즈에 빠져들었다.

36년 음악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한 손목인은 우리나라 최초의 스윙밴드 CMC밴드를 결성했다.

해방후 손목인은 CMC밴드를 확대 편성해 쇼 무대를 화려하게 장식하고, 새로 개국한 HLKA방송국의 음악담당자가 됐다.

한국전쟁중인 51년 손목인은 일본으로 밀항, 57년 추방될 때까지 일본 대중음악계에서 활동했다.

귀국후 손목인은 영화음악에 손대는 한편 음악저작권협회를 결성해 초대회장이 됐다.

67년 미국으로 이민을 떠난 손목인은 82년 12월 미국생활을 청산하고 영구 귀국했다.

그후 '손목인음악센터' 를 세우고 작품활동과 후진양성을 계속했다.

그가 일생 작곡한 노래는 1천곡이 넘는다.

작곡가 손목인이 지난 9일 갑자기 별세했다.

평소 그의 말대로 음악으로 살아 왔고 음악으로 일어섰으며 음악속에 살다 갔다.

고인이 우리 가요계에 남긴 족적 (足跡) 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새삼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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